- 시선 (수정본) 2026.02.03
- 꿈결 2025.02.19
- 루드티아와 여는 대화 2025.02.05
- 루드티아와 대화 (4) 2025.01.13
- EGG 2025.01.09
기존에 투고하였던 '시선'을 약간 보강해서 백업합니다.
원본 : https://sfe2library.creatorlink.net/forum/view/1284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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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을 만난 사람이 있다. 그는 키가 크고 '희뿌옇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이름은 ‘루드빅’이었다. '루드빅 오발리스'. 나는 늘 '루드빅 씨'라고 불렀다. 나는 한때 그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해결사’라고 불리는 용역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해결사는 그 단어 그대로 '곤란한 일을 해결해 주는 직업'이다. 해결사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거나, 수학을 유별나게 잘하거나, 기계 설비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에게 맞는 일을 대신 도맡아 주는 것처럼 해결사들도 자기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보수를 받아 간다.
물론 앞서 말한 재능을 내세운 직업들은 각자 자기에게 맡는 이름이 있다. 번역가, 물리학자, 엔지니어…. 그런 이름으로 제 위치에 있다. 해결사는 그보다 복잡한 직업이다. 탐정, 심부름꾼, 파출부. 이런 단어가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그것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런데도 '해결사'라는 단어를 내세우는 것은, 이 지역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초능력'이 너무나 당연해진 이곳에서, ‘초능력’을 스펙으로 내세워 일하는 사람을 두루뭉술하게 말하기 위해서 붙은 게 ‘해결사’다. 물론 직업의 일종일 뿐,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무조건 해결사로 일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물을 X-ray처럼 꿰뚫어 볼 수 있는 (흔히 ‘투시’라고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난 해결사가 아니다. 해결사로 일하기엔, '투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가 매우 한정적이다. 해결사로 살아가려면 조금 더 '각별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해결사가 만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영웅 같은 것이라는 말은 아니라…, 구체적으로 비유하자면, ‘병원에 MRI 기계를 옮기기 위해서 하루 고용된 지게차 운전사’에 가깝다고 표현해야겠다. 전문적인 인력이 없으면 처리하기 어려울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에 딱 맞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때 고용하는 게 ‘해결사’였다. 나도 연구에 필요한 표본을 구하기 위해, 해결사를 고용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다만, 루드빅 씨와의 첫 만남은 그런 해결사와 고용인 같은 딱딱한 관계가 아닌, 그저 어쩌다 마주친 사람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 일을 내가 해결하려 했다. …특이한 생물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숲속을 멋대로 돌아다니던 중에 그를 만났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니, 다리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부산스럽게 수풀을 지나다니는 소리가 갑자기 멈춘 것을 눈치챈 그는 천천히 뒤돌아, 길고양이같이 샛노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보면 안 될 것을 봤다는 것처럼….
그러나,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게 느껴졌는지, 이내 그는 한결 부드러운 얼굴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그 큰 키로 살랑살랑 뒷짐을 지고, 수풀을 가르며, 느긋하게 걸어오는 모습에 그만 몸이 움츠러들어 뒷걸음질 칠 뻔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물러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몇 걸음도 안 되어 단숨에 내 앞으로 온 그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여, 당장 내 코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얼굴을 바짝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 안녕하세요….”
차가워진 등줄기를 달래기 위해서, 나는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그러자, 그는 마치 오랜만에 본 사람에게 인사라도 하는 듯한 억양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가 그때 정확히 어떤 말을 하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초면이 확실함에도 경칭 하나 없이 경박한 말투였다. 신난 태도 하며, 높임말이라곤 하나 없는 말투,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을 반가워하는 말투…. 딱히 싫진 않았다. 그저 당황스러워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가 다가올 때 그의 뒤로 얼핏 보였던 게 동물의 사체였기에, 살벌한 기분이 들어서라도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일까? 그의 다른 모든 행동은 (부담스러울 만큼) 호의적이었다. 떨떠름하게 그의 뒤에 있는 사체에 관해 물으니, 그는 자신이 해결사임을 털어놓고, “의뢰 중이었어.”라는 간단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런 숲에 맨몸으로 혼자 돌아다니다니, 배짱이 장난 아닌걸.” 그의 얇은 입술이 길어지며 초승달처럼 씨익 웃었다.
나는 그의 말에 자초지종을 풀어놓았다. 표본을 구하려 했단 것. 그는 내 사정을 주의 깊게 듣더니, 잠시 기다리라 말하곤 자리를 떴다. 잠시 기다리다가, '이참에 도망갈 걸 그랬나.'라고 떠올릴 때는 이미 시간이 매우 지나있었다.
"정말로 기다리고 있네?"
곧 있으니 그가 이런저런 생물을 잡아 와 내 앞에 던지듯 건네었다. 대부분 숨이 붙어있고, 단단히 묶여있었다. 그가 정말로 무언가를 '해낼' 것 같았기에,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나는 초능력이 생긴 시점에 같이 나타나기 시작한 생물들을 연구하는 학자로 일하고 있어서, 그가 베푸는 호의가 아주 달가웠다. 물론 멋대로 잡아 오는 것이 합법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불법도 아니었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도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러고는 고작 대가로 본인과 식사해달라는 소소한 것 정도만을 요구해서,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던 의심조차 사라질 정도로 계속 반복됐다. 자연히, 점점 그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알고 지내면 지낼수록 그에게는 '가정적'… 그런 단어가 어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의 기분에 맞춰 행동하는 것은 번거로웠지만…. 삼시세끼 밥을 해주고, 도시락도 챙겨주고…. 내가 자취하던 곳에서 나갈 때가 되자 같이 사는 것을 권하고…, 결국 숲 근처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을 때도 여전히 식사를 챙겨주고, 초조해질 정도로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그렇게까지 해주면서도 내게 바란 것은 소박했던 것 같다. 그냥 같이 있어 주고, 대화에 어울려주면 됐다. 이런 행동만 두고 본다면 그는 '이상적인 짝'이다….
다만, ‘식사’에 집착이 강한 사람이라서, 나의 식사를 전부 자신이 만든 것으로만 채우고 싶어 했다. 그런 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으니 나는 잘 따랐다. 그는 요리 실력은 당연히 좋았다. 흠이 있다면 손이 너무 커서 매번 배가 터질 것처럼 먹어야 했다. 마른 몸에 비해, 루드빅 씨는 식사량이 너무 많았다. 힘들었다. 그러나 알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맛은 있어도 투박하던 음식'이 날이 갈수록 섬세해지고, 본인보다 내 입맛을 더 신경 쓰기도 했다. 식탁에 앉아 그가 만든 요리를 먹고 있으면, 그는 서 있는 채로 나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와 인연이 멀어진 상태다…. 내가 일하는 연구소가 어느 날인가 부지를 옮기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나도 사는 곳을 옮겨야 했다. 더 좋은 건물로 가는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루드빅 씨에게 전했는데, 어째선지 그의 반응이 탐탁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분명 나와 다시 떨어져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여겼다. 그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가 새로운 집을 또 구하는 것도 무리였기에, 나는 그에게 '예전에 그랬듯이' 떨어져 지내도 자주 볼 수 있을 거란 얘기를 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나 '역시' 아쉬운 마음을 품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어째 나와 같은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그와 떨어져 지내도 그는 나를 따라다녔는데, 그 빈도가 자주, 간간이, 가끔, 간혹, 어쩌다 한 번… 이내 한 달에 한 번 보는 것도 어려워졌다. 나는 그게 신경 쓰여 생각날 때면 그에게 연락하긴 했지만, “미안, 일이 바빠서.”라는 간단하고 무정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언제나 나를 챙겨주었는데…. 내가 그를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주지 못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선 안 된다고들 하지만, 성인(聖人)이 아니고서야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된 게 아닐까. 그는 마치 무대 위에 서 있는 등장인물처럼 흐름이 끝난 후에, 막이 내리면 더는 만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생각에 답답한 기분이 등을 눌러와서, 한숨을 길게 쉬고 있으니, 옆에서 비덴스 씨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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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덴스 씨와 처음 만난 날은 공교롭게도 루드빅 씨와 연이 흐려지기 시작할 때다. 비덴스 씨는 불그스름하면서도 거뭇거뭇한 부분이 있는 갈색 머리가 인상 깊은 남자로, 키가 크고, 순하게 생긴 눈매에 헤이즐 색 눈동자를 가진 수수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표본용으로 연구실에서 키울만한 특이식물의 정보를 얻기 위해 주변에서 자문하다 보니, 자연스레 만났다.
비덴스 씨는 조용한 편이라, 그저 내 이야기를 듣길 좋아한다. 입이 무거운 것과 달리, 그는 적막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그가 차를 우려내어주는 동안, 공기에서부터 바닥으로 먼지 쌓이듯 내려앉은 침묵을 후후 불어 날려 보내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침묵을 날려 보내기 위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그는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하다가, 곧 여러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일이나 사생활을 자세하게 말할 상황은 되지 않아서, 그저 그의 가게 한 쪽에 앉아 이러저러한 동식물 얘기를 늘어놓는 게 전부다. 원예에 조예가 깊은 그와 대화하면, 생물학적으로 다가가는 나와는 약간 생각이 달랐다. 그 방향이 매우 흥미롭다. 비덴스 씨는 루드빅 씨와 비교하자면 별로 알고 지내게 된 날이 길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흥미가 겹치는 부분이나, 그의 성격이 친절한 덕에 부쩍 친해졌다.
그의 능력은 그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성격과 어울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갖은 식물이 피어나는 모습을 한 번 보면, 누구든 감탄할 것이다. 제비꽃, 산수화, 패랭이꽃, 네모필라, 이름 모를 들꽃이며…. 나는 그 광경이 신기하여서 그에게 식물에 관한 생물학적인 온갖 질문을 던졌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잘 모르겠어요, 제가 그쪽에 빠삭하진 않아서….”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럼 나도 어째선지 부끄러워져서, 흥분했다며 사과했다. 그러면 그는 아무런 다른 말도 하지 않고 “티아나 씨는 아는 게 정말 많네요.”라며 상냥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만든 식물은 파릇파릇하고 단단하게 살아있다. 물을 주면 고개를 부드럽게 들고, 바람에 흔들리면 그에 맞춰 손짓하는 이파리를 가진 어여쁜 화초들. 그가 그런 아름다운 식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하는 식물을 떠올리고, 그 식물만큼의 열량을 소모해서 손바닥에서 키워내는 것뿐이라, 식사를 거르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식물이 클 때까지는 꽤 많은 열량이 필요하겠지만, 풀로 배를 채우는 것이 어려운 만큼 식물 자체의 열량은 적었기에, 그는 그 능력으로 작은 꽃집을 차려 먹고 살기 부족하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다른 일은 안 해보셨나요?” 나는 장미의 가시를 다듬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대화하기 위해 손에 든 원예용 가위를 내려놓았다.
“다른 일이요?”
“네, 다른 일….”
“음… 어떤 거요? 꽃집 말고라면, 여러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평범하게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다닌 적도 있긴 하네요.”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비덴스 씨는 내 말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뭔가 다른 걸 기대하셨나 봐요.”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아… 사실 능력이 흔치 않은 거라, 해결사를 해보셨을까 해서요.” 나는 내심 루드빅 씨를 생각하며 말했다. 뭔가 실례를 범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말에 비덴스 씨는 자신의 짧은 옆머리를 걸쳐질 리도 없는데도 귀 뒤로 한 번 쓸어 넘기며 허공을 봤다가, 도로 나를 보았다.
“해결사요? 생각도 안 해봤어요. 하긴, 특이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일이죠.”
“아하하…. 맞아요.” 나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특이한 사람이라…. 분명 그렇다. 내 웃음에 그는 더 활짝 웃으며, 자기는 꽃을 피워내는 것이 전부라서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 덧붙였다. 그건 그렇다.
해결사도 하나의 단기 아르바이트 정도로, 즉,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공고문에 지원해서 건당 임금을 받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루드빅 씨처럼 해결사 일로만 먹고사는 사람도 있다. 보통 그런 사람은 능력이 아주 유별난 경우가 많았다. ‘물건을 띄우는 능력’(염력)은 흔한 편이다. 그런 능력을 다루는 사람은 그 능력을 제3의 손으로 이용하여 일상생활을 유지할 뿐, 그것으로 먹고사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그 능력이 아주 섬세해서,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겨우 보일 것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면 제법 유별나지 않겠는가.
루드빅 씨 역시 유별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해결사로만 생활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그의 능력을 무어라 정의하기엔 어려웠다. ‘욕심이 많다’고 느낄만한 능력이었다. 어쩌면 ‘변신’하는 것만이 그의 능력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 방법이 복잡했다.
그는 그림자처럼 검고, 유연한 촉수를 몸에서 꺼낼 수 있었다. 샘이 땅에서 솟아나듯, 아니면, 빗소리에 지렁이가 땅 위로 기어 나오듯 피부 위로 죽 뽑혀 나오는 촉수들. 손처럼 쓸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짐승이나 사물을 가리지 않고, 부드럽게 감싸 그 흔적도 없이 먹어 치울 수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면 그 음식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그는 그의 촉수가 ‘먹어 본 것’으로 신체 일부든 전체든, 변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유지하고 조금씩 변해가지만, 그가 욕심이 많은 것인지, 질투가 많은 것인지, 그런 사실은 알 수 없어도…. 먹은 것들의 모습 그대로 변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변신'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변신’한 존재의 능력을 쓸 수 있었다. 말이 능력이지, 초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마치 원래 그런 동물로 태어났던 것처럼 자유롭게 오감을 사용했다. 특별한 시각이 필요하면 갯가재의 눈을 빌렸고, 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개, 고양이 같은 흔한 동물부터 올빼미의 귀까지 아끼지 않고 수단을 동원했다. (개나 고양이를 촉수로 먹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어지간히 흔한 생물이라면 모조리 튀어나왔기에 넘어갔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그 변한 몸에 적응해서 마음대로 쓰는 거냐 물었는데, 그는 그저 ‘따라 한다’라는 말 정도를 남겼다.
“따라 한다니요?”
“음…. 설명하기 어렵네. 그렇지만 사람은 다 따라 하면서 커왔잖아?”
“교육… 을 말씀하고 싶으신 거죠?”
“그래, 뭐, 그런 거 말이야. 고양이가 ‘고로롱’거리는 게 본능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어미한테서 배운다고도 하잖아. 어느 쪽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 그러니까 말이야, 뭔가로 변했을 때 머릿속에 떠올라. ‘따라 해야 할 것’이 말이야. 나는 그게 ‘필요’하면 따라 하는 거야. 냄새로 길을 찾는 것도, 초음파로 어두운 동굴을 파악하는 것도. 사람도 배운 모든 것을 항상 시도하는 건 아니잖아? 필요하면 하는 거지. 누에가 뽕잎을 선호하는 게 누에나방에게서 배운 게 아니잖아. 그냥 본능적으로 솔잎이랑 뽕잎이 같이 놓여 있으면 뽕잎을 먹지.
난 ‘신체’를 따라 할 수 있어. 신체에는 뇌나 신경계도 포함되어 있고. 그렇다면 본능에 의한 ‘따라 해야 할 것’들은 당연하게 따라오는 부속품이야. 물론 그 본능은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갑자기 무척 생리학적인 느낌이네요.”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뭐, 아쉽게도 초능력은 따라 할 수 없는 모양이야.”
“…그, 그건 어떻게 아시는 거죠?”
“…특이생물 중에도 초능력을 쓰는 녀석은 있어.”
물론 그런 능력에 나는 가끔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세간에 아직 제대로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초능력이, 우리가 갈구하던 것과 연결되어 드러난다는 가설. 염력이 유독 흔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야 우리가 평소에 바라는 것이 염력과 가까워서 그럴 것이다. 누워서 전등을 끄고 싶거나, 멀리 있는 리모컨을 가져오고 싶거나, 어깨 아프지 않게 짐을 들고 싶거나, 그런 소소한 욕망. 이 외에도 입이 아프도록 밤새 설명해야 하는 모든 기워 맞춘 듯한 욕구와 초능력 사이의 연관성. 초능력은 신체와 관계없이 오직 정신력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현상’에 가까운 개념이었기에, 이런 가설이 나와도 다들 그러려니 넘어갈 수밖에 없다. 욕망이 능력을 끌어낸다. 개개인이 바란 것이 현상을 끌어낸다. 아주 그럴싸하다.
어떤 '성격 검사'가 유행해서 회사 면접 자리까지 그 위치를 하나 차지하고 있던 시대처럼, 다들 이 가설에 혹해서 타인을 몰래 평가하곤 했다. 지금은 생존 본능 외에 그렇다 할 욕구가 있을 리 없는 신생아에게서도 초능력이 관찰되니, 다들 우스갯소리로 삼지만, 여전히 소유자와 초능력 사이를 이어주는 가설 중에서는 가장 유행하고, 힘 있는 가설이다.
그런 가설에 기반해서 루드빅 씨의 능력을 생각하면 어딘가 이상하다. 촉수가 나오거나 그런 것은 대충 넘겨버릴 수 있다. 분명 누군가는 염력이 물질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어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촉수를 가지고 있다면 그러려니 싶다. 하지만 그 촉수가 형태를 자유롭게 바꿔, 무엇도 아니고 오직 '자신이 먹은 물체'로만 변한다니. 어딘가 기분이 이상해질 뿐이다. 자신을 남의 모습으로 바꾼다는 것은 어떤 욕망일까? 누군가는 질투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수치심이라고도 하지만, 단백질로 이루어진 기계…, '동물'에 불과한 우리에게 그런 감정은 뇌 속에서 차이점 하나 없는 동일체일 수도 있다.
조금 전에 말한 가설에 설득력을 줄 정도로, 그는 미묘하게 본인의 모습에 자신감이 없단 듯이 구는 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침 일찍 눈을 떠 방을 나서면 항상 잘 정돈된 모습으로 부엌에 서 있었고, 단둘이 외출할 때 차림이 조금 편해진 나와 달리, 여전히 가볍게라도 차려입은 모습이라는 점. 해결사가 하는 일 중에서도 '사냥'이나 '격퇴' 같은 과격한 단어를 붙여 설명해야 하는 험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구두와 정장, 허리가 날씬하게 내려오는 코트로 치장했다. 그런 모습 뒤에 있을 너저분한 모습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 것인지, 그는 내게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이건 그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야기인데, 겁 없이도 호기심이 먼저 치밀어 올라온 나머지, 나는 내 눈으로 그를 ‘꿰뚫어 보려’ 했었다.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내부마저도 자유로운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납덩이를 X-ray 앞에 가져다 두고 찍은 것처럼, 뿌연 실루엣이었다.
그랬던 그의 행동을 생각하고 있다 보니, 얼굴이 구겨지는 탓에 괜히 창밖을 바라봤다. 이렇게 창문 너머를 보고 있으면, 저 많은 사람 중에 그가 섞여 있을 것만 같다. 그라면 할 수 있다. 길고양이든, 들개든, 가로등이나 현관문 같은 무생물부터, 지금 저기 지나가는 '사람'으로 변해서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
“티아나 씨?”
비덴스 씨가 뒤에서 작게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자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다. 나는 목소리가 살짝 새어 나와 “아.”하고 알아차린 티를 냈다. 그는 내 얼굴이 어두워 보여,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는 것만 같아 신경 쓰여 불렀다며, 만약 아픈 곳이 있다면 비상약이 몇 개 있으니 필요하다면 꺼내오겠다고 말한다. 나는 괜히 웃으며, 햇빛이 눈을 찔러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비덴스 씨는 회답하듯 웃으며, “다행이네요.”라고 말했다.
3
그날은 비덴스 씨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나를 조심스럽게 그의 가게로 부른 날이었다. 그는 어딘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가게의 불도 켜지 않고 안에 앉아 있었다. 애초에 약속 시간에 맞춰 가게 앞에 도착하니, 유리문에 ‘CLOSED’라 적힌 팻말이 붙어있어서, 그가 가게 안에 없는 줄만 알았다. 나는 문 앞에 서성거리다가, 유리문 너머를 보기 위해 손으로 눈 주변을 가리고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기다리자 그가 카운터 뒤편에서부터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죄송해요.”
그는 인사보다도 먼저 사과하며 나를 맞이했다. 그는 괜히 오른쪽 옆머리를 귀 뒤쪽으로 밀어 넘기는 행동을 하며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런 그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가게 안의 조명이 꺼져있어서, 생화로 꾸며진 진열대가 조화로 가득한 것만 같다. 벽이며 선반이며 어디든 가득한 화초가 건강한 짙은 초록색 이파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어두운 조명 속에서 그것들이 새까맣게 보여 마음이 불안했다.
나는 일단 늘 그와 얘기하던 자리에 앉아 그를 안심시켰다. 비덴스 씨는 자리에 차마 앉지도 못하고 유리문 밖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숨을 그 옆에 놓인 화분의 이파리가 흔들거릴 정도로 한 번 푹 내쉬고서야, 나와 마주 앉았다. 그러곤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그는 도저히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몰라서,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을… '나'를 불렀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그저, 자신이 안전한 것 같은지 가끔 확인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 자체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나, 영문을 알 수 없어 이해되지 않으니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스토킹이나, 괜한 사람을 오해한 해결사 중 하나가 그를 뒷조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경찰을 부른다면 분명 해결되리라 생각하고, 그가 이야기를 마치면, 일단 그를 진정시키고 그리하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기분이 찜찜한 것을 넘어서 불쾌해질 뿐이었다.
그는 몇 주 전, 정기 휴일인 월요일에 평소 가보지 않은 동네로 외출을 나갔다고 한다. 어딘가 좋은 화초를 파는 가게나, 기분 전환에 좋은 경험이 생길까 싶어서 말이다. 동네 이름은 분명 나와 루드빅 씨가 살던 곳 근처였다. 이곳에서 아주 먼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까운 곳도 아니니, 분명 ‘외출’로는 좋은 위치다. 무엇보다 그 동네와 이어진 큰 숲은 산책길이 잘 되어 있어서, 식물을 좋아하는 비덴스 씨라면 마음에 들어 할 곳이다.
그런 예상에 걸맞게 그는 중간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그 산책로 근처에서 내려, 숲길을 따라 동네까지 걸어가려 했다.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죠?”
“아, 예… 맞아요.”
“가는 중에 마주친 사람은 있나요…?”
“으음… 아, 그나마 마주친 거라면 한 분 기억 나는데… 별로 상관없을 거 같아요….”
그는 산책로를 따라가던 중에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야생동물을 마주친 것은 아닌지 무심결에 돌아보았다. 그러자 검은 코트를 입은 키가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비덴스 씨는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너무 놀라서 몸이 굳었다고 한다. 나는 그 부분에서 누군가가 생각나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비덴스 씨는 그런 내 표정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 남자는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아,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히 사과하고는 덤불을 헤치고 나와 산책로로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잠시 자기 앞에서 옷을 툭툭 털며 정리하더니, 그대로 자신을 앞질러 산책로를 걸어갔다. 비덴스 씨는 그 모습에 떨떠름하게 서 있다가, 그 사람과 거리를 조금 두고 뒤에서 멀찍이 걸어갔다고 했다.
비덴스 씨는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어가다가, 앞서가던 남자가 방향을 틀어 정돈되지 않은 숲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멀리서 그 뒷모습을 보다가, 그 길 앞에서 발이 멈춰서 그 남자가 향하는 곳을 먼저 바라보았다. 저택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작고, 흔히 있는 개인주택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집 한 채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나는 입을 꾹 닫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루드빅 씨의 집이다. 그 집은 산책로 중간에 난 길을 통해 걸어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항상 그 길이 깨끗하게 정리되어있던 게 기억나서, 비덴스 씨가 말한 ‘정돈되지 않은 숲길’이 신경 쓰였다. 정리하길 그만두신 걸까? …손님이 없어서?
그는 도전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불러 세우는 일도 없었다. 그대로 길을 지나 동네에 도착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하다가, 괜찮은 카페가 있어서 가볍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나무로 된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창가에 있는 자리가 아늑하고, 천장이 높은 카페라. 그 동네에 있는 카페는 아직도 잘 있나 보다. 그 카페는 루드빅 씨도 좋아했지….
루드빅 씨는 카페에 가면 내가 있든 없든 늘 풍경을 바라보고 계셨다.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무언가를 '해소'하시는 것 같았다. 분홍색 옷을 입은 사람을 보다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지면 이제 회색 바지를 입은 사람을 보고, 다음으로, 그리고 그다음 사람, 그리고 다시 그다음 사람…. 바깥에 사람이 적어서 볼 게 없다면,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조금씩…. 말씀은 없었지만, 눈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분명 그러고 계셨다. 늘 누군가를 보고 계셨다. 나를 볼 때와는 다른 눈빛이다. 내가 동물을 볼 때도 저런 느낌으로 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덴스 씨는 카페에 앉아 풍경을 구경하거나, 핸드폰으로 SNS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때,
“어라? 혹시 그날, 저한테 문자 보내신 날인가요?”
“마, 맞아요. 예전에 그 동네에서 살았다고 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나에게 가볼 만한 식당을 아냐는 문자를 보내고, 대화를 조금 주고받은 후, 그는 무언가 뒤를 돌아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면서.
그렇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인간은 흰자가 도드라지게 발달한 동물인 만큼 시선에 민감한 생물이니, 분명 그렇게 ‘느껴질 정도의 시선’이라면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테다…. 내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눈'처럼 보이는 것조차 없이, 그저 누군가가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만 든 상태로 비덴스 씨는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에서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카페에서도 한참 멀어지고, 산책로를 지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중에도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닌지, 혹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장난을 친 것은 아닌지 (혹시 모르지, 그런 느낌을 주는 초능력을 가진 자가 있을지) 다양한 의심을 하며, ‘가장 아니길 바라는 것’을 나중으로 두고 여러 검사나 수소문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제일 마지막으로 미뤄둔 ‘진짜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라는 사실만이 남아버려서 불안하다며 하소연했다.
“오늘은 어떤가요?”
“지, 지금은 괜찮아요. 티아나 씨는 안 느껴지시나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다, 다행이에요. 가끔 온 손님 중에서도 몇 분이 시선이 느껴진다고 했었는데….”
나는 그를 진정시킨 후에, 괜찮을 거라며 달랬다. 혹시나 더는 못 견디겠으면, 해결사를 불러보자며. 그러자 그는 이딴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귀찮게 했다면서, 미안하다고 한다. 그는 사과의 의미로 작은 화분과 과자와 차 세트를 내게 건넸다. 화분에는 둥근 다육식물이 심겨 있다. 그는 끝까지 내게 고개를 숙이며 나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의 배웅을 뒤로 하고 길을 가면서, 화분은 창가에 두면 좋겠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집에 가는 길에서도 비덴스 씨의 이야기가 계속 신경 쓰여서, 아주 오랜만에 루드빅 씨에게 연락하고자 핸드폰의 연락처를 들여다보았다. 연락 기록에서 찾기엔 너무 오래되어, ‘L’까지 길게 스크롤 하여 그의 번호를 찾았다.
첫 번째로 건 연락에서는,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는 ‘삐’ 소리가 날 때까지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나는 가슴께가 뻐근할 정도로 답답해졌지만, 입은 벌리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호가 간다는 것은 그나마 좋은 징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싫다면 멋대로 끊겠지. 그러니 다시 한번 더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그리고 두 번,
세 번째… 중간에 끊겼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곧장 “여보세요?”라는 말을 외치듯이 말하려 했으나… 전화를 받거나 거절한 게 아니라, 그저 잠깐 신호가 안 가서 끊긴 것이었다. 민망한 기분 속에서 신호는 다시 이어졌다. 또 신호가 끊겼으나,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피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
내가 먼저 전화를 걸면, 그는 첫 번째 인사에서 대답하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매번 침묵한다. 그럼 나는 잠시 그 적막에서 들리는 사소한 잡음을 듣고 있다가, 다시 인사한다.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분명히 루드빅 씨의 목소리다. 나는 무심결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막 자고 일어난 듯한 목소리였다.
“주, 주무시고 계셨어요?”
“으응. 근데 별일이네, 네가 먼저 전화를 걸고.”
그의 목소리에 묘한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다.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천이나 솜 따위가 움직이는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그런 소리를 듣고서야 목구멍에 남아있던 뻐근한 느낌이 사라졌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흠….” 스피커 너머에 있는 루드빅 씨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앗,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잘 지내고 계신가 싶어서요!”
“흐응, 못 지낼 건 없지.” 익숙한 대답이다.
“매번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실제로 ‘잘 지내지’ 못해도 저리 대답하니 어쩔 수 없다.
“너야말로 잘 지냈어?”
“네? 네.”
“나 없이도?”
그 말에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망설여져, 가만히 굳어있었다. 어색한 숨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스피커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듯이 뒤통수가 따갑다.
“사실은,”
웃음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파고들어 와 내 입을 막았다. 웃음을 멈추고 침묵하고 있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곤란한 일이 있어.”
“앗, 어, 어떤 일이요?”
“이젠 집에 네가 없어~. 재미없어. 이건 중대 사항이야.”
나는 그의 말에 황당해진 기분을 숨기려고, 그냥 다시 웃는 것을 선택했다.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별로 재미없는 것처럼. 스피커 너머는 정적이었다. 살짝 웃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웃음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웃음을 멈추자, 그는 마치 어려운 글을 읽기 위해 입으로 읊조리며 더듬을 때처럼 어색하게 말을 이어갔다.
“요즘 점점 마음에 안 들어….”
목소리가 느릿하게 스피커를 통해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부글부글. 그런 단어가 머릿속에 지나갈 만큼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랬던 적이 있었나? 기분 때문에 여러모로 태도가 변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찝찝한 감각 때문에 내 오른쪽 귀에 기댄 핸드폰을 쏘아보듯 눈을 돌렸다.
“뭐가요?” 다짜고짜 마음에 안 든다고 하니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따지듯이 묻고 싶었다. 그래도 내 얘기가 아닐 수도 있으니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어서 스피커 너머에서 기어 나온 것은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어떻게든 고쳐가면서라도 살아가고 싶었지만, 더는 무리인 거 같아….”
“무, 무슨 소리인가요. 혹시, 그….”
“얼굴.”
차마 멍든 곳을 건드리는 것처럼 되어버릴까 싶어 피했던 말을 루드빅 씨가 대신 가로챘다.
“마, 맞, 음, 그래요. 얼굴이요…. 만약 그런 고민이라면, 저… 저는, 루드빅 씨가 어떻든 루드빅 씨면 괜찮다고 생각하니까요….”
거짓 없이 나는 말했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예 생각도 못 해본 부분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은 그 사람을 아껴줄 수 있는가.’ 그렇게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애초에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할 수 있다.”라고 대답하겠지. 그렇지만 이런 나를 그는 알고 있을 테니, 그는 이런 내 말 따위,
“너는 애초에 사람 모습 따위는 안중에도 없잖아?”라는 말로 어딘가 슬프게 반문할 뿐이었다.
오늘은 그의 기분이 걱정될 수준이다. 그냥 이런 고민에 ‘루드빅 씨는 잘생겼어요!'라는 말 한마디로 기분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말을 해도 허울 좋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석연찮게 웃어 넘겨버리거나, '잘생긴 거 외엔 관심 없는 거냐'라는 극단적인 말을 꺼낼 수도 있으니, 전혀 할 수 없다. 이런 대화로는 비덴스 씨의 일을 물어볼 수가 없다. 아니, 생각해보니, 물어봤자 그건 누구냐면서 '관심 없다'라는 말씀을 할 것이다. 가까운 해결사라곤 루드빅 씨뿐인데…. 그렇게 나는 얼굴을 아래로 하고 그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침묵한 상태로 있었다. 곤란하다.
“어쨌든, 넌 ‘내’가… ‘나’면 된다는 거지?”
어쩐 일로 이해해주셨다.
“맞아요!”
“근데 그런 간단한 고민이 아냐. 훨~씬 큰 고민이야. 나는 말이야, 이왕이면 '누군가'가 좋아하는 내가 되고 싶어.”
그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는 소리를 했다. ‘누군가’? 혹시 고백인가? 두근거려야 하나? 루드빅 씨가 하는 것처럼, ‘반했다'라는 농담이라도 건네어야 하나? 어떻게 행동해야 그가 만족하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침묵해 버렸다. 그러고는 그는 내가 습관처럼 흘리는 어색한 웃음을 따라 하는 것처럼, 어설프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이라도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내일?”
“으음, 그게…. 저….”
“뭐야~ 안 된다면 안 된다고 해.”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하더니,
“그런데, 너… 안부 인사를 하고 싶단 이유로 전화한 게 아니지?”
낮고 스산한 말 한마디가 지나가자마자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그의 말에 인기척을 느껴 곁눈질로 주변을 보았다…. 고개를 돌릴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당연히 아무도 지나다니고 있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적막한 거리다. 노을이 하늘을 붉게 적시고, 그 빛에 모든 게 홍차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아름다움은 뒷전이고 허탈함이 먼저 들어왔다. 거리에는 그저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는 건물 벽과 늘 있는 가로등 몇 본, 늘 있는 볼라드와 울타리가 놓여있을 뿐이다. 화초도, 가로수도 그대로였고, 지저귀는 새나, 길고양이 역시 없었다. 시야 속 사물은 당연하게 조용했다.
4
“오늘은 좀 어떠세요?” 나는 비덴스 씨의 꽃집에 며칠을 연달아 방문하며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최근에는 그 느낌이 사라졌어요…. 누가 쳐다보는 느낌이 사라지니까 이제 좀 살 거 같네요.” 그는 짧은 옆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기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나는 비덴스 씨에게 웃으며 답했다.
비덴스 씨는 전보다 훨씬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다. 나는 안심했다. 명치 근처에서 해소를 느꼈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이 사람을 자주 찾아오게 됐지…. 그래, 분명 ‘시선’에 대한 문제를 처리해 주고 싶어서…. 이제 그도 괜찮으니 더 찾아올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만 조금 신경 쓰여….
그런 생각에 다시 찾아온 불안이 머리를 휘감아,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번 전화에서 루드빅 씨에게 정곡을 찔린 탓에,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문자를 주고받았다.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은 맞지만, 그래도 나도 나 나름대로 신뢰하는 사람을 찾아가려 했을 뿐이니까…. 아니, 이것도 한심하다. 그렇지만, 내 기억 속에서 루드빅 씨는 그렇게 모진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더욱 그렇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분명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겠지. 그렇지만, 역시 그 마지막 말은 기분이 좋지 않다….
그렇게 조금 고민에 빠져있으니, 내 안색이 어두워 보였는지, 비덴스 씨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까지 다가왔다. 특이생물과 비교군으로 둘 식물을 고르고 있던 중에다가, 루드빅 씨와의 대화를 다시 살펴보느라, 어느샌가 테이블 위는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정돈이 안 된 테이블 때문에 마주 앉기 난감했는지, 비덴스 씨는 테이블 끝자락에 손가락만 살짝 걸쳐 상체를 지탱하고, 쪼그려 앉아서 나를 올려보았다.
“표정이 안 좋으세요….”
“아아,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죠…. 저는 괜찮으니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테이블 정리는 도와드릴게요.”
“그래도 괜찮다면…. 네, 고마워요.”
나는 비덴스 씨와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고, 내 짐을 챙겨 가게를 나섰다. 그가 뒤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고,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느린 걸음으로 조금씩 따라 걸어갔다. 해는 아직 지지 않았지만, 늘어선 건물의 그림자가 기울어져 머리 위가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마 아래에 모인 비둘기는 몸을 동그랗게 하고 쉬고 있다.
그렇게 길을 걸어가다 불현듯, 내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생각에 그곳을 향해 초점을 맞췄다. 그림자 같은 사람이 하나 서 있다. 긴 코트와 희뿌연 얼굴…. 분명 루드빅 씨다. 나는 반가운 것인지, 질타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는 마음으로 그의 앞으로 가볍게 뛰어갔다. 그는 내가 뛰어오는 동안 단 한 발짝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루, 루드빅 씨!”
나는 불안한 마음에 그의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름을 먼저 불렀다. 그는 그런 내가 앞으로 올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도착한 나를 약간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미소 지었다.
“안녕, 티아나 양.”
그는 여전한 모습으로, 여전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나는 그에게 미소 지으며 무슨 일로 왔냐며, 달갑게 말했다.
“딱히. 별일 없어. 그냥 왔어.”
“저, 저 보려고요?”
“어머? 그렇다고 해줄까?”
나는 그 말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그 웃음에 따라 웃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그의 침묵을 대답으로 생각하고, 지금 집에 들어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에 흥, 하고 새침한 소리를 한 번 흘리고는 ‘배웅해 주겠다’며 내 옆으로 나란히 섰다. 그 말에 나는 다시 다리를 움직여 길을 걸어갔다.
“조금 전에 꽃집에서 나오던데.”
그가 나지막이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 때문에 식물 관련으로 정보를 얻다 보니 친해진 사람이 하는 꽃집이라고까지 말했다. 생각보다 많은 자료를 구했어요. 상냥한 사람이에요, 갈색 머리를 하고 있어요. 아차. 이런 얘기는 하지 말아야 했나. 하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어딘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한 노란 눈동자가 두 개 놓여있는 얼굴.
“….”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와중에도, 그는 듣고 있다는 티를 낼 뿐이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끄덕이는 것과, 짧은 감탄사. 초조해진다. 나는 그가 묻지도 않은 연구실 얘기부터 시작해서, 이 근처에 맛있는 미트파이를 파는 가게까지 다 말했다. 마치 너무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근황을 모조리 털어놓는 것처럼. 오랜만까진 아닌데도. 언제든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었는데. 언제든지 전화든 문자든 해서 말할 수 있는 것들인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처럼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잘못한 거 같아. 어쩌면 맞을 것이다. 그는 나를 위해서 많은 걸 해줬는데, 고작 떨어져 지내는 동안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도 못 해주다니. 분명 그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신 걸 거야. 이제부터라도 잘하자! 기분이 나아지면 분명 예전처럼 연락도 자주 하실 거고, 식사도 초대해 주시고, 도움도 주실 거야. 내가 곤란할 때 늘 그는 도와주고 싶어 하셨으니까. 내가 스스로 해낼 때 실망한 눈치를 보이면서까지 도와주고 싶어 하셨으니까. 도와달라고 하면 반기실 거야. 분명 그럴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떡하지? ‘사람을 이용할 줄도 안다’고 냉소를 지으시면 어떡하지? 그야 그렇잖아. 그건 당연한 것들이 아니니까.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야. 그렇지만 나는 비덴스 씨를 도와주고 싶은데….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루드빅 씨가….
우리는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했다. 그는 정찰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집을 살펴본 것 같다. 그러고는 인사라도 하고 싶으셨는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차가운 손이 내 손바닥의 살과 살 사이 틈… 손금을 비집고 기어들어 오는 것이,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들어오실 거죠?”
나는 그가 손을 잡고 멀뚱히 있는 것이 신경 쓰여, 집에 초대하겠단 의미를 담아서 넌지시 물어봤다. 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내 손을 가만히 붙잡고 있었다. 그의 엄지가 내 손등을 살짝 어루만진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면 내 손등을 이룬 피부는 마치 탄력 있는 천으로 만든 커튼을 옆으로 제칠 때와 같이 주름이 잡히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의 엄지에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힘이 들어가 있어서, 내 손등에 있는 뼈와 혈관이 서로 엇물리는 듯한 느낌이 부적절하게 전해졌다.
“왜 그러세요?”
“아니야….”
미묘한 대답으로 말을 마친 그는 계속해서 내 손을 주물렀다. 주물렀다고 해야 할지, 쓸어낸다고 해야 할지. 차가운 손가락이 내 손등 위에서 나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지나간 자리에 남은 축축한 한기가 마치 예상치 못한 빗방울을 맞았을 때와 같다.
그가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살가죽을 만질 때는 가끔 있었지만, 보통 배나, 어깨, 손바닥같이 ‘살'이 잡히는 곳이었다. 이렇게 ‘가죽'과 ‘뼈'라고 느껴지는 손등을 만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촉각을 만족하려고도 아니고, 말로 전하기 어려운 애틋함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 손길은 어딘가 ‘탐색'하는 듯 느껴져서 오싹함이 스쳤다. 그의 손가락이 날카로운 도구로 돌변할 것만 같은 기분에, 나는 손을 느릿하게 뺐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딱히 붙잡지 않고 내 손을 보내 주고, 텁,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힘없이 손을 떨궜다.
“잘 가, 티아나 양.”
“루, 루드빅 씨도요. 들어가시면 연락하세요.”
“….”
“…들어갈게요!”
나는 내 집에 들어가려 뒤돌려는 순간, 그의 시선이 약간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잠시 열쇠를 고르는 척, 걸음을 멈추고 그 시선을 잠시 머릿속에서 따라가 보았다. 사선으로 왼쪽 위로 올라간다…. 외벽을 지나서… 지붕에서 내려오는 파이프를 지나서… 창가…, 화분이 놓여있는 곳…. 서늘함이 등줄기에 흘러서 뒤를 돌아보니, 그는 길을 떠나고 없다. 먼 곳까지 둘러보았지만, 노을에 길어진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루드빅 씨에게서 연락이 오는 대신, 비덴스 씨가 늦은 저녁 시간에 짧은 문자를 보냈다. 시선이 다시 느껴진다는 얘기였다. 내일 오후에 들려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평소대로 오후 시간에 가보겠다며 이야기했다. 몇 마디의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마무리했다. 내가 있어봤자 도움이 되는 것은 하등 없겠지만, 비덴스 씨가 불안을 덜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도움이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간만에 긴장한 탓인지 피로가 몰아쳐서 순식간에 잠들었다.
그러고는 기상 시각을 알리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서늘한 아침이었고, 별다른 일 없으리라 생각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비덴스 씨에게서 온 연락이 하나 더 있었다. 부재중 전화.
전화?
가슴께가 조이듯 불안한 나머지,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이부자리에서 주저앉은 상태로 나는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 정도 가던 참에 덜그럭하는 소리가 난다. 분명 전화를 받은 소리였다.
“여보세요?”
어째선지 첫 번째 인사에서 대답이 없어 불안하다. 그가 전화를 받아 전화기를 귓가에 대기도 전에 인사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다시 한번 더 인사했다. 목소리에 불안이 남아버려서 괜히 말을 더듬었다.
“여, 여보세요…?”
“앗. 안녕하세요.”
놀란 듯한 비덴스 씨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들린다.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새벽에 전화하셨길래….”
“아…, 죄송해요. 잘못 눌린 게 아닐까 싶네요. 아침에 보니까, 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잠들었더라고요.”
그는 말끝에 작게 웃는 소리를 붙이며 말했다. 그 웃음에 안도감이 몸을 감싸서, 움츠러든 어깨에 힘이 풀렸다. 나도 모르고 있었던 두통이 가라앉는다. 마음 같아서는 이완된 정신에 따라 다시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나가야만 했기에 억지로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전화 때문에 새벽에 깨셨나요?”
“아뇨, 그랬다면 바로 비덴스 씨한테 전화했겠죠.”
잠깐의 정적. 마치 숨을 참을 때처럼.
“그렇군요….” 그가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숨소리가 유독 섞였을 뿐이라,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다.
“오후에… 들릴까요?”
“그러면 고맙죠. 그런데… 이제 나갈 준비 하셔야지 않나요? 가는 데에 40분 정도 걸리신댔죠?
“아, 아…? 네, 그 정도….”
“그럼 어서 준비하셔야겠네요. 제가 끊을게요. 아침부터 폐를 끼쳤네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비덴스 씨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자, 전화가 끊겼다.
그에게 내 출근 시간을 말한 적이 있던가.
5
오후 늦게 찾아간 꽃집은 입구에서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꽃집의 계산대 역할을 하는 길쭉한 테이블, 그 뒤에 마련된 작업실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 너머의 조명이 꺼져있다. 그러나 손님을 맞이하는 곳은 밝게 불이 켜져 있다. 내부가 깊어 보인다. 흐린 날 커다란 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운 복도를 보고 있을 때처럼 깊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꽃집의 공기는 어딘가 차분하고 공허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기자, 가림막 뒤에서 어둠을 등지고 비덴스 씨가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낯설게 느껴지는 꽃다발이 들려있다. 그는 꽃다발을 제 자식이라도 되는 양 품에 끌어안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아, 어머. 벌써 오셨어요?”
“네, 약속한 시각이잖아요.”
“그랬지… 내 정신 좀 봐요. 연습하느라 잊고 있었어요.”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로 가라앉은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어제 그가 보낸 메시지와는 달리 침착한 그의 상태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신 걸까? 그는 가만히 꽃다발을 근처에 내려놓더니, 자기 왼팔을 스스로 오른팔로 부여잡으며,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런 행동이 그를 쑥스러워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지만, 어째선지 기분을 알기 어렵다.
“역시 제가 부르면 이렇게나 바로 와주시는군요.”
“…예?”
의아한 말을 잇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반쯤 뜨고 올려다보는 것인지 쏘아보는지 모르겠는 시선과 그의 등 뒤에 놓인 어두운 작업실이 마치 풍경화처럼 맞물려, 나는 등을 뻣뻣하게 세웠다. 어째선지 긴장이 습관처럼 찾아왔다. 익숙한 경직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그는 평소처럼 오른쪽 옆머리를 귓등에 꽂으려는 듯이 쓸어 넘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언제나 그랬단 듯이, 아니 실제로 그래왔기에…,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대로 테이블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알맞게 뜨거워진 물로 차를 우리고, 데운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 행동에 어색한 구석은 없었지만, 어째선지 계속 신경 쓰여서 내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저… ‘시선’은 어떤가요?”
“이제 괜찮아요. 앞으로도 괜찮을 거 같아요.”
‘앞으로도’는 무슨 확신으로 하는 말인가? 해결사나 경찰이라도 간밤에 불러서 해결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를 부를 이유는 없을 테다. 의문이 머릿속에서 꼬여서 당최 풀리지 않는다. 밖에서 덩치가 큰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초저녁을 알리는 소리다. 손이 시리다. 나는 찻잔을 감싸 쥐었다. 그 온도가 손바닥을 달군다. 향기는 익숙하다. 분명 저번에 비덴스 씨가 사과의 의미로 챙겨준 선물에 있던 차와 같은 차다. 나는 차를 마시지 않고 가만히 그를 보았다. 나를 잠시 보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무언가 할 일이 떠올랐다는 듯이 움직였다.
관엽식물의 이파리를 닦고, 시들해져 추욱 늘어진 화초에 물을 주고, 꽃다발을 준비한다. 한참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다. 전화가 울리면 그것을 받아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고, 감사하단 말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시 화초를 관리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젖은 손을 앞치마에 비벼 가볍게 물기를 없앤다. 또 오른쪽 귀에 머리카락을 넘기는 모습…. 원예용 가위를 들고 장미의 가시를 다듬는다. 잠시 두리번거린다. 허리를 굽혀 서랍을 연다. 서랍 안에는 꽃다발을 감쌀 때 쓰는 종이가 있다. 색을 고른다. 연한 분홍색의 얇은 종이를 집어 든다. 검지와 엄지로 두 장을 세어 꺼낸다. 가림막 뒤로 갔다가, 빈손으로 나온다. 평소와 같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위화감만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같다. 그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불쾌하리만치 ‘매끄러운’ 행동이 내 눈알에 박히는 것만 같다.
다시 꽃을 바라는 손님의 전화가 울린다. 그는 손을 넓게 펴 수화기를 집어 들고,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인다. 그는 귓가에 수화기를 얹고, 늘 그렇듯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인사를 한다. 몸을 반쯤 돌려 창을 등진다. 머리를 더욱 기울여 어깨와 머리로 수화기를 고정한다. 노란색 메모지를 꺼내 들고, 팔을 바짝 몸에 붙여 볼펜으로 요구사항을 적어 내리는 그 모든 모습이…. 곧게 펴진 허리에 바짝 묶은 앞치마의 끈과 그가 서 있는 모든 모습이….
‘누군가가 비덴스 씨를 따라 하고 있다….’
작살처럼 꽂힌 생각에 숨 쉬는 것을 멈추었다. 울대뼈 언저리에서 턱 막힌 숨을 간신히 의식적으로 넘기었다. 놀란 나의 숨결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참았다. 아래턱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이를 악물고 싶지 않다. 턱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곧 떨림을 멈춘다. 이를 악문다. 혀를 굴려 억지로 입을 떼어낸다. 마른 입술을 찻잔의 내용물로 적시지 못하고, 침으로 무마한다. 그런 나의 경련 같은 행동을 그는 아직 모르고 있다.
전화가 끊기자, 그는 메모지에 열심히 옮겨 적은 내용을 다시 살펴보고,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벽에 붙였다. 벽에는 그것과 비슷한 메모지가 서너 개는 붙어있다. 며칠 전에도 붙어있던 것 사이에 새로운 것이 붙었다. 그가 방금 붙인 메모지만 유독 눈에 꽂힌다. 빳빳한 종이. 종이 위에는, 외국어를 배울 때 ‘이렇게 쓰라’고 옅은 회색으로 알려주는 글자를 따라 쓴 듯이, 남의 글자를 그리 쓴 듯 다른 메모지의 필기와 달리 이질적이었다. …같다. 같지만 다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꼭 쥐어 진정시키려 했다. 고양이 앞에 멈춰 선 시궁쥐처럼 몸이 멋대로 멈칫거려서, 평소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왜 그러세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는 내 앞에 쭈그려 앉아, 테이블에 손을 조금만 걸친 후 그 손 위에 턱을 올려 나를 올려다보듯 바라보고 있다.
“아, 아무것도….”
“표정이 안 좋으세요….”
이전과 똑같은 목소리.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로요? 비상약이 있는데….”
“그, 그만 하세요…!”
“네?”
요동치는 심장에서부터 올라온 목소리로 그에게 호통쳐버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다.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다. ‘버틸 수 없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서, 마치 지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혼미하다. 어지럽진 않다. 그저 혼미하다. 찻잔이 멀어 보이고, 등 뒤가 허전하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손이 테이블 위를 기어 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꼼짝 못 하고, 그 손이 내 손까지 기어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섬찟하게 차가운 손이 내 손을 감싼다. 미지근하게 체온에 가깝게 식은 찻잔과 비교하자면, 그것은 마치 냇가에 떠내려오다가 발치에 도달한 젖은 나무토막. 그늘에 내버려 두었던 고기 토막. 물렁거리는 익숙한 체온.
“괜찮으세요?”
알고 지내던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남의 말은 어떤 기분이라고 표현해야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까.
“얼굴이 창백하세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납덩어리처럼 보일 때의 기분을 무엇이라 말해야 전해질까.
“루드빅 씨….”
“….”
이름을 읊조리자, 그는 내 손을 감싸기를 그만두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걸음은 둥글게 움직여,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등 뒤다. 아마 나를 내려 보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차마 들 수 없어서 가만히 찻잔을 보니, 조용한 수면에 천장이 반사된다. 건조한 조명 아래 그림자 진 그의 형태가 미끌미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길게 수면에 늘어져 있다. 그가 그늘을 만들어 내 머리 위에 어둠을 드리우고, 나는 그 그림자 안에서 몸을 움츠렸다. 꼼짝없이 가둬진 것만 같다. 나와 그의 두 얕은 숨결이 교차하는 순간마다, 바닥에서 ‘끔찍함’이 발목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 발목에서 무릎 뒤를 이어서 허리를 타고 목까지 기어 올라왔을 때,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찻잔에 퐁당퐁당 빠지자,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울고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고개를 저을 수도, 끄덕일 수도 없어서 그냥 눈물을 흘렸다. 그런 나를 그는 제 몸통이 내 등에 닿을 만큼 크게 감싸 안더니, 어깨를 가만히 도닥였다. 등에서 맥동이 느껴진다…. 하지만 따스함은 전해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포개졌을 때 느껴지는 아늑한 온기는 없다. 그 사람의 흉통이라 느껴지던 것은 이내, 싱싱한 거머리나 지렁이 따위가 가득 들어 있는 비닐봉지 속에 소금을 넣고 흔들었을 때를 연상케 할 감촉으로 움실거렸다. 귓가에서 진흙을 끓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눈을 질끈 감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 하지만 눈을 감는 것은 안 된다. 그가 ‘보란 듯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팔을 타고 그의 팔이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내려오는 게 보였다. 어깨에서, 팔꿈치를 지나서 손목까지 도달하고, 천천히 손등을 덮는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사람 형태로 뭉친 끈벌레들의 행진 같다. 사람으로 지내고 싶어서 그러한 형태로 뭉친 것처럼 보인다. 그림자는 무슨 색인가요? 검붉지 않다. 푸르지 않다. 향기가 없다. 온도는 차갑다. 그림자의 그림자…. 부자연스러운 빛깔을 지닌 촉수 덩어리가 내 손을 감싸 쥔다.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는데 이러면 의미가 없잖아….”
그는 누군지 모르겠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저 “죄송해요….”라고 대답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그리 말하면서도, 그것이 ‘그’에게 무언가 ‘자비’ 비슷한 것이라도 얻고 싶어서 말하는 것인지, 표현하기도 어려운 죄책감이 사무쳐서 말하는 것인지 자신도 구분이 힘들다. 그저 용서를 구했다. 빌고 있으니 그가 내게 대답한다.
“네 잘못은 별로 없어. 정말 없다고 해도 되는 건지, 사실 나도 확신은 못 하겠어. 따지면 전부 내 잘못이지. 그런 정도의 상식은 나도 있어.”
말을 마쳐도 나의 대답이 없자, 그는 희미하게 이빨 사이로 숨을 집어넣고, 다음 말을 쏟아내듯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거 알아? 너는 내가 ‘루드빅’인 걸 봐 온 사람이잖아? 그래서 나를 여전히 ‘루드빅’으로 봐주고 있잖아? …나는 그게 굉장히 마음에 들어. 정말로 너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루드빅’으로 보고 있구나! 넌 ‘내’가 ‘나’면 좋다고 했었지. 진심이었구나. 너는 매 순간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해준 거야. 기뻐. 정말이야. 이걸 드디어 확인할 수 있게 되다니. 기뻐. 사무칠 정도야.
하지만…, 잘 모르겠어. 다른 사람의 감각을 알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너는 가끔 내게 ‘박쥐의 시야는 어떻게 느껴지냐’고 물어보곤 했잖아? 근데, 어떻게 느껴지는지 나도 몰라. 분명한 건 사물이나 작은 벌레가 어디 있는지 느낄 수 있단 사실이야. 다른 동물을 물어봐도 나는 그 감각이 어떻다고 답할 수 없을 거야. 그런데도 다들 호기심 때문에 그런 걸 궁금해하지. 너도 그래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본 거잖아. 너는 호기심 많으니까.
‘다른 존재가 된다’는 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색다른 감각이야.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 자체가 ‘미식’과 같았어. 사람들은 아무리 멋진 음식을 먹어도 결국엔 ‘맛있다’는 표현으로 끝내지. 결국 그런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감각’만을 느꼈을 뿐인데, 사람들은 계속 ‘맛있는 것’을 찾아. 그런 거야. 내가 다른 것으로 변했을 때의 감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건, 그런 거지. ‘맛있다’라는 건 ‘만족’을 표현하는 것이지, ‘감각’을 표현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소린지 알겠지?
음…, 그렇지만 난 너처럼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게 아냐. 그 ‘맛’을 알고 싶은 게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어. 난 그냥 부러워했어. 남들은 뭐길래 그리도 ‘꽉 들어찬 느낌’을 주는지 너무 탐나서, 오장육부 따위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그 모든 게, 어떡하지, 울어버릴 것 같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게 고작 질투라는 사실’을 남이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니? 비웃나? 가여워하나? 뭐 그런 건 어찌 되든 좋아…, 그래…. 만족을 몰라서… 난 계속 탐내서… ‘배고파서’… 결국에는 ‘루드빅’이라는 사람이 된 거야.
하지만 마음에 드는 걸 먹어서 변해봤자 어차피 곧 ‘내’가 되어버리니까 의미가 없어. 다시 텅 비어. 내가 가진 게 늘어날수록 내가 가지지 못한 게 늘어나. 점점 내가 늘어나니까 결국에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안 먹고는 못 배기겠어. 맛을 알았잖아. 어차피 사람들도 ‘음식’은 먹어버리면 ‘맛’과 ‘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새롭고 맛있는 걸 찾아 먹잖아? 정말이지 손해밖에 없는 삶이야.
너는… 난 네가 마음에 들어, 하지만 먹어 없애버리고 싶지 않아. 너는 ‘나’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네 앞에서 ‘내’가 되고 싶었어!
난생처음 느껴보는 거였어. 나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어. 일단 생물이긴 하니까 무언가를 먹는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있었지. 그게 내 피와 살이 되는 건 어차피 소용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도…. 하지만, 하지만, 어째선지 너와 지내는 모든 순간에서 ‘내’가 ‘나’로 느껴져서….”
기아에 허덕이는 듯한 숨소리. 고해다.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그런데 말이지… 사실 처음에는 괜찮았어, 우리는 원래 떨어져 지냈잖아? 하하…. 아무래도 괜찮았어, 그냥 네가 조금 떨어져서 지낸다고 해서 넓은 집이 쓸모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웃는 얼굴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 없는 것도 아냐. 그래서 처음엔 내가 널 보려고 자주 갔잖아. 너도 그것에 무척 기뻐했고 말이야. 나도 기뻤어, 즐거웠어. 그런데 네가 점점 멀어지는 거 같은 거야…. 내 얘기 듣고 있지? 듣고 있는 거 맞지? 나, 너한테 이야기하는 거 맞지? 음, 으음. 등장인물들은 역할이 끝나면 어디로 갈까?”
“네가 멀어지면 내 역할은 필요가 없어, ‘루드빅 오발리스’ 같은 거창한 이름도 필요 없고, 곱슬곱슬한 하얀 머리도, 샛노란 눈도, 마른 몸도 필요 없어. 어디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서 먹고살기 좋은 전공을 골랐다는 과거도, 그런 대학도 질려버려서 나갔다는 선택도, 험한 일만 골라서 하는 해결사라는 신분도. 지금 이 말투도.
네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한때 알고 지내던 사람’ 정도로 그치게 된다면 ‘나’는 더 있을 필요가 없어. 누구든지 그런 사람이 있지? 예를 들자면, 어릴 때 어깨동무하며 날마다 같이 하교하던 친구 같은 거 말이야. 어떤 사람한테는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누구한테는 부모님? 뭐든 그 ‘순간’만큼은 평생 지낼 것만 같잖아?
하지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서, 환경이 바뀌어서, 별의별 이유로 나타나는 것들이 관계에 파고들면, 더는 그들이 ‘너의 사람’이란 역할을 가질 수 없어. ‘네 시선 안’에서 살지 못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네 앞에서 ‘내’가 될 수 없어….”
“그렇지만 나한테는 좋은 방법이 하나 있거든, 그 새로운 등장인물을 하면 되는 거잖아. 자 봐봐, 이 거뭇거뭇한 갈색 머리, 초록색 눈에 순한 인상. 네가 마음에 들어 했지? 정말 다행이야, 이 사람이라면 초능력도 흉내 낼 수 있어.”
살굿빛의 기묘한 덩어리는 내 손을 여전히 감싸고 있다. 나의 얼굴 근처로 구멍 뚫린 구체… 얼굴이 다가온다.
“사람은 겉모습 말고는 하등 쓸모가 없어,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렇다고, 겉만 갖추면 내용물은 저절로 만들어져. 상자는 뭔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만, 담길 게 있으니까 상자가 있는 거야. 목숨은 물질이 아니지만, 뇌는 물질이니까! 당신이 마음에 들어 한 ‘제’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이 언젠가 말했죠. ‘몸이 있기 때문에 영혼이 만들어진다’고!
‘나’는 그 말에 아주 동의했어. 이거 보세요, 단순히 그 사람의 모습을 하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그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물론 습관이 아닌 것들까지 할 수는 없으니까…. ‘따라 하라’고 떠오르지 않는 것들까지 내가 할 수는 없으니까, 계속 그 사람을 봐야만 해. 계속 집요하게 바라보는 거야. 평균을 구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 너는 연구하는 모든 생물이 어떤 ‘습관’을, 어떤 ‘본능’을 가졌는지 계속 관찰하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껍데기만 있으면 그런 건 전부 따라 할 수 있어. 전부 내 것이 되는 거야. 하지만 역시 내 것이 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어. 내가 의미가 없으니까….”
“나는 아무 의미가 없어….”
그는 마치 추운 밤에 걸친 담요처럼 나를 감싸고, 내 양어깨를 다섯 개씩 두 쌍, 총 열 가닥의 촉수 덩어리로 쥐었다.
그의 중얼거림이 점차 격양되어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아우성처럼 들렸다. 수십… 수백…? 수천도 될지도 모른다…. 그것들의 비명이 하나가 되어 들리는 것 같다. 그 모든 게 ‘그’가 되었기에…. 나는 더 눈물 따위를 흘리는 것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머릿속이 수압으로 짓눌린 느낌이다. 뇌수를 쏟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중에도 그의 모든 행동과 말투는 ‘모방’으로 보였다. 분명 누군가의 흔적이다…. 분명 누군가의 삶이다…. 분명 누군가의 온도다…. 분명 누군가의 것이다…. 그 모든 게 그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살아오는 모든 순간이 그에겐 ‘애드리브’다…. 각본 없는 연극을 계속 연기하기 위한 발버둥이다…. 그는 마치 이것이 마지막 대본집이라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절규 같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티아나, 티아나! 티아나 페인! 당신은 내가 어떤 것이든지 표본처럼 핀을 박아서 하나의 이름을 붙여 줘! 그저 ‘나’인 것 자체에 ‘의미’를 주는 거야. 더는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야! 나는 당신만 있으면 언제나 여기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냥 계속 있어 줘, 계속 있어 줘, 외로워, 외로운 건 싫어, 없어지고 싶지 않아, 없어지지 말아줘, 확실해지고 싶어, 확실하게 해줘. 명확한… 명찰을… 명찰이…. 나만 껍데기를 쫓아다니며 살아가야 하는 건 억울해, 싫어, 무엇이든 되어줄게, 무엇이든 옆에 있어 줘…….”
지독하게 눈길을 주는 곳마다 따라붙는 외로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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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일어난 일은 아니다.
꿈을 꿨습니다.
때는 오후? 해가 지는 것인지 뜨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하늘이? 보였습니다. 창밖은 언제나 그렇듯? 한산함으로 붐벼서? 루드빅 씨와 저는 단둘이? 집 안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암전. 전환.
그는 하얀? 까만? 부드러운? 축축한? 털? 돌기? 가 빼곡한? 길쭉하고 유연한? 생물로 제 곁에 나타나 제 왼팔을 아늑하게? 감쌌습니다. 그것은 울렁거리며? 술렁이며? 팽창하거나? 수축했고, 곧 여러 모습이? 됐습니다. 그럼에도 그 노란 눈만큼은 그대로였고, 목소리 역시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제 왼팔을 붙잡아? 감싼? 그는 어딘가 기운 없고 서글픈? 목소리로 제게 말했습니다.
1. 사실 나는 루드빅 오발리스가 아니야.
2. 여태까지 속여서 미안해.
3. 그럼에도 너한테는 루드빅으로서 함께 있고 싶어.
저는 그런 말을 듣고? 느끼고는? 벙쪄서? 어색해서? 안타까워서? 제 왼팔을 잡은 그의 손? 촉수? 날개? 앞다리? 를 제 손으로 덮어 쥐고는 나지막이? 당당히? 말했습니다. 괜찮다고. 저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그러자 그는 제가 본 적 없는? 어렴풋이 본 듯한? 어색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제 어깨에 고개를? 파묻으며 제게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그 미소는 저녁? 아침? 노을에 물들기 좋았으며, 저 역시 그 미소와 그의 행동에 안심을 느끼며 거실 한가운데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방으로 들어가 하루를 마쳤고, 저와 그는 다시 각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깨버렸으면 좋았을 텐데요.
암전, 전환.
꿈속의 아침은 서늘? 했습니다. 어째선지 너무나 적막하고? 쌀쌀하고? 습해서? 곧장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나갔습니다.
암전, 전환.
복도.
암전, 전환.
그의 방.
암전, 전환.
2층에서 1층으로 가는 계단.
암전, 전환.
거실. 쭉 들어가 주방.
어디에도 루드빅 씨의 모습이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살림은 반듯하게 정돈된 게, 마치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려는 듯 기세등등했습니다. 그저 그가 외출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였지만? 동시에 다신 만날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들어섰습니다. 확신은 사실이 되어 짧은 순간을 며칠로 만들어버렸고, 창 안팎으로 한산함이 붐볐습니다. 저는 마치 커다란 마트에서 돌아다니던 중, 어머니의 손을 놓쳐 바삐 식료품 판매대 곳곳을 들여다볼 때마다 아는 실루엣이 나타나길 기대하며 두리번거렸지만, 모르는 사람들의 무관심한 눈만이 마주친 아이와 똑같은 기분이 되었습니다. 루드빅 씨…. 저는 입을 열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분명 대답은 없었고, 평소보다 훨씬 춥게만 느껴지는 집에서 어찌할 도리가 없던 중에?
꿈에서 깬 것입니다.
유독 춥습니다. 날이 춥다고 하여도 유독 춥습니다. 이불을 반쯤 걷어낸 상태로 일어났지만, 다시 이불을 몸에 감쌌습니다. 잠시 그렇게 정체를 모르겠는 기분으로 누워있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는 핸드폰 때문에 번쩍 눈이 떠졌습니다. 일어날 시간입니다. 제 생각에 이런 기분은 아주 어릴 때 한 번 겪어본 것 같습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저는 불안한 생각이 스쳐,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재빨리 빠져나왔습니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들리는 소리는, 기름에 자글자글 구워지는 요리의 소리. 코끝을 스치는 고소한 냄새. 저는 기분이 나아져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주방으로 몸을 틀어보니 그의 뒷모습이 가스레인지 앞에 있습니다.
"… 좋은 아침이에요. 루드빅 씨."
"일어났구나, 좋은 아침~ 아침밥 하고 있으니까, 자리에 앉아 있어."
저는 테이블에 앉아 그가 요리하는 뒷모습을 몇십 초인가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제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동그랗고 도톰하며 평평한 세라믹 접시에 요리를 담아냅니다. 제 앞에 그릇을 내려놓고, 그는 제 앞자리에 앉아 제 모습을 봅니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요리를 원하는 크기로 잘라먹었습니다. 맛있어요. 루드빅 씨는 그제야 만족한 듯 저를 향해 기울어져 있던 상체를 의자에 기댑니다. 그가 일순간 눈을 낮게 깔고 슬픈 듯이 허공을 바라보긴 하였으나, 그것이 기분 탓인지, 정말로 그가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왜 그런 꿈을 꿨던 걸까요? 꿈이란 것은 생물이 만들 수 있는 훌륭한 비물질 중 하나였기에. '내심'이라는 단어들이 뭉쳐서 마치 예언이라도 되는 듯이 나타나기에. 저는 아무 말을 할 수 없어서 그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식사하며….
한심한 밤에는 생생한 꿈을 꾸기도 한다.
단순하게 환한 거실이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있었고, 내 모습은 내려다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가장 거슬리던 것은 당최 시야에 집어넣으려 해도 잡히질 않고 테두리에서만 돌아다니는 티아나 양의 모습이었다. 눈으로 좇아도 쫓아도? 하여간에 잽싸다니까? 그런 감상을 느낀 적은 원래 한 번도 없었지만.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단 한 번 나를 부르지 않았기에. 난 그저 개지 않고 쌓아둔 마른빨래처럼? 소파에 늘어져 그 모습을 볼 뿐이었다.
꿈이라고 하는 건 아무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 새침한 가상 세계이기에, 나는 마치 소파에서 잠든 후 갑자기 깬 것처럼 새로운 풍경에 자연스럽게 놓여있었다. 거실 한가운데에서 그의 손을 맞잡고 서 있었다. 감촉은 없었지만, 확실히 잡고 있었다. 그의 배경에는 무수한 짐. 분명 내 등 뒤엔 아무런 짐도 놓여있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여, 뒤돌아보지 않고 티아나의 입 근처를?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이전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단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고, 티아나는 뚱한 표정으로 한참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꿈은 언제나 어두컴컴하여 공연을 끝내고 관객석만을 훤히 비추고 있는 극장의 무대 위에 서 있을 때처럼 삭막하였는데, 이번도 그랬기에. 나는 가만히 어두운 쪽에 서서 관객석을 등진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가벼운 한마디를 건네는데.
즐거웠지요, 언젠가 또 봐요.
라고, 말하는 듯 혼자 홀가분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바람 빠진 풍선 (밝은 색깔을 가진 광대가 꾸깃꾸깃 만져대며 망아지나 강아지나 칼, 꽃이나 나비를 만들어 쥐여준 덕에 누군가는 분명 소중하다고 여겨 손에 꼭 쥐고 다녔을) 이 된 나는 손에서 손이 부드럽게 빠져나가 계단을 저벅저벅 내려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층 난간에서 무대를 내려가는 그의 환한? 손 인사를 보고는 나도 모르게 양팔을 가볍게 머리쯤까지 들어 올려 좌우로 살랑였다. 그렇다면 무대는 끝이다. 그럼…, 이제 나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앞에 막이 쳐진 듯 어둠으로 가려지고서야.
꿈에서 깼다.
나는 사실 꿈에서 깼을 때 꿈에 대해 깔끔히 잊어버리고 (그러고 싶어서) 그저 찝찝한 불안감으로만 가득했는데, 시간을 보니 동이 트기 조금 전이라서 잠자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지 않았는데. 식사 준비를 위해 방에서 나오고는, 바로 마주 보고 있는 그의 방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니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한참 멀리서 바라보다가, 나는 도로 문을 닫고 주방으로 걸어갔다. 끼익, 끼익…. 계단이 우는 소리가 차근히 퍼진다. 속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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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티아와 여는 대화
루드티아와 취향문제
그 말은 진짜로 이쪽이 더 마음에 든단 거?
…네.
이야, 너도 참 작살났구나.
직후 몇 시간 정도 루드빅은 인간이 아닌 모습으로 요리와 식사, 청소나 허드렛일을 해주었다. 앞치마도 착용. 티아나는 미묘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루드티아와 캐릭터도시락
어느 날인가 티아나는 우물쭈물하며, 살짝 미소를 띤 수줍고 묘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다음에 바위집구리 모양으로 만든 요리로 도시락 싸주시면 안 돼요…?"
루드빅은 당황스러워서, "그래."라고 말하기까지 약 1분이 걸렸다. 다음날 그는 정말로 바위집구리의 형태를 활용하여, 주먹밥이 들어간 동양 스타일의 도시락을 담아줬고, 티아나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루드티아와 생명창조
죽어있네요.
응, 죽어있지.
살아있게는 못하나요?
할 수 있었으면 내가 창조신이지.
산 채로 드셨잖아요.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죽은 거밖에 없어.
목숨은 물질이 아냐.
아쉬워요.
소금물에 담가놓고 전기로 지져봐.
영혼이 생길지 누가 알겠어?
그건 소설 얘기죠….
혹시 모르잖아, 이능력이 있는 세상인데….
루드티아와 생명창조 (2)
목숨이 너무, 너무 간단한 형태라서, 정말로 정전기 하나만으로도 다시 영혼을 얻어 움직일 수 있는 생명체라면. 티아나는 가설을 세웠다. 뇌는 영혼을 만드는 장기다. 육체는 끊임없이 유기질과 무기질을 바라고, 그렇게 생체 전기를 만들어서, 영혼을 만든다. 영혼은 몸을 움직인다. 몸은 영혼의 노예다. 몸은 감옥이 아니야? 루드빅이 까탈스럽게 말했다. 몸이 있어야 영혼이 생긴다. 루드빅은 그 말엔 고개를 끄덕였다.
루드빅은 티아나의 가설대로 너무나 간단한 생명체를 손바닥에서 만들기 시작했다. 정전기 하나로도 생명이 시작할 수 있는 구조. 그야말로 기계와 같다. 누군가 동물은 기계인형과 같다 말했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임을 납득하게 되며 인간도 기계인형과 같아졌다. 병원에서의 광경.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무것도 썩지도 파괴되지도 않은 신체. 강렬한 전기. 온몸이 마치 생명이라도 깃든 듯 한 번 크게 발작하는 모습. 생명이 돌아올 수도, 돌아오지 못할 수도. 둘이 하는 행위 역시 비슷하다. 티아나의 눈이 혁혁하다 말할 만큼 빛난다.
루드빅의 손바닥에서 너무나 단순하며, 짧둥한 사지(?)가 달려있을 뿐인 하나의 하얀 육괴(肉塊)가 떨어져 나온다. 사이즈는 가히 검지 한 마디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다. 티아나는 자신이 입은 니트에 양팔을 비비다가, 손을 뻗어 생물을 만졌다.
딱!
푸른 섬광을 잠시 뽐내며, 광속처럼 느껴지는 속도. 정전기가 티아나에서부터 생물에게로 이어졌다. 티아나는 손끝이 아팠다. 생물은 마치 통증이라도 느끼는 듯 움찔, 움직였다. 그 생물은 자석 따위에 이끌려가는 철 가루처럼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떤다. 루드빅은 그것을 내려다보며, 뭉개버리고 싶었지만, 티아나의 열중하는 모습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생물은 어설프게 기어가기 시작했다. 눈도 입도 코도 없고 오직 피부로 호흡하며 느끼는 생물. 루드빅 씨! 해냈어요! 티아나가 외쳤다. 응, 그렇네. 루드빅이 석연찮게 대답했다. 생물은 계속 기어간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생물은 곧 결심한다. 루드빅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어디선가 느꼈다.
본인이 만들어낸 것에서부터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살아있는 것을 떼어낸 적 없으니, 단 한 번도 살아있는 기분을 떼어낸 것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페인트, 죽은 나무로 이루어진 합판, 플라스틱, 벽지, 벽돌, 이 저택을 이루는 모든 것들. 그것들은 살아있지 않아서 루드빅에게 아무런 기분을 주지 않았다. 랑코구 10마리, 비둘기, 산호머리사슴, 뿔떠들썩오리, 춤깃나리, 메기, 그런 것들을 공허를 변하게 해 만들어냈어도, 그들 모두 '죽어있기에'. 아니, '사물'이었기에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몸을 공허와 섞어 둘러 이뤄낸 변신만이 생물로 기능해 자신의 육체처럼 느꼈을 뿐이었다.
피부로 땅을 파악하며 기어가는 그 질감, 차가운 나무 테이블 위 얹어진 유리, 살에 채이는 작디작은 먼지, 그들이 웅성거림에 따라 떨리는 피부, 아무런 것도 들을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피부, 짧둥한 사지, 그 몸에 갇힌 것만 같으면서도,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으니 아무런 불편도 못 느끼며, 눈이 없으니 질투할 수도, 귀가 없으니 실망할 수도 없는 생물의 기분. 그러나 어째선지 어떻게인지 태어난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생명에서부터 시작한 배신감, 불쾌감, 불안감. 생물은 도피를 결심한다. 테이블 끝으로 계속 기어가고 있다. 루드빅은 피부로 느끼는 숨에 짓눌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티아나는 계속 생물을 쳐다보고 있다. 가위에 눌린다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그러고 보니 그래, 나의 조각이니까 어쩔 수 없구나. 루드빅은 생각한다.
테이블 끝에 도달한 생물은 태엽을 너무 돌려서 멈출 줄을 모르고 책상에서 떨어져 버린 플라스틱 장난감처럼 추락한다. 티아나가 놀란다. 다행히 다른 점이 있다면, 개미를 테이블에서 떨군다고 죽지 않는 것처럼, 그 생물 역시 죽지 않은 것이다. 너무 작기 때문에. 티아나는 그 생물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생물에겐 멍이 들기 시작했다. 그럴듯한 내장도, 뼈도 없이 태어난 하나의 지렁이 같은 생물. 그렇기에 연약하여 멍이 드는 생물. 하얀 피부 위로 물감이 스미듯 빠르게 퍼지는 멍. 티아나는 생물을 손 위에서 바라본다. 어쩜 좋아, 늦어서 못 잡았어요. 어떡하죠? 너무 아파 보여요. 막았어야 했는데, 미안해서 어떡하지. 서글픈 목소리. 그제야 티아나는 루드빅을 본다. 루드빅은 테이블 위에 엎드려있다. 루드빅 씨? 왜 그러세요? 아, 내 생각에, 이건 하면 안 될 거 같아. 루드빅이 엎드린 상태로 말한다.
살아있게 하면 안 될 거 같아.
루드빅 씨, 아파 보이세요. 괜찮으세요?
괜찮아.
루드빅은 티아나에게 생물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티아나는 양손에 담은 생물을 내밀었다. 멍이 가득하다. 루드빅은 생물을 집어 들어, 짓뭉개버렸다. 뭐 하세요?! 티아나가 놀라 소리쳤다. 안락사. 루드빅이 답했다. 티아나는 숙연해졌다. 루드빅이 헛구역질을 한 번 한다. 앞으론 죽은 거만 만들자. 네. 그리고 죽은 걸 살리지 말자. 그럴까요? 응. 둘이 번갈아가며 말한다.
루드티아와 날씨에 굴하지 않는 관찰자
모레에 분명 태풍이 온다 했는데….
집 날아갈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
뿌리가 엄청 깊거든.
그거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다고요.
뭔데?
이번 연구에서 오직 풍속 30~50m/s에 도달한 날씨에만 이동하는 것으로 밝혀진 이계생물의 자연적인 움직임을 관찰 가능해요.
으음, 그쯤 되면 이동이 아니라 그냥 굴러다니는 거 같은데.
그걸 이용하는 거죠! 회전초처럼요!
근데 설마 관찰하러 나가고 싶은 건 아니지?
…사실 좀 위험해서…, 아쉬운데…, 그게….
아직 야생에서 실제 촬영된 케이스가 없고….
같이 굴러다니고 싶어?
그렇지만….
….
….
루드빅은 탐사 지역에 간이 셸터를 지었다. 관찰은 성공적이었고, 티아나 역시 만족할 만한 영상을 찍을 수 있었다. 해당 생물이 그렇게 인기 있는 종이 아닌 탓에, 직접 찍은 영상은 학계에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티아나가 관찰에 푹 빠져있는 동안, 루드빅은 맛있는 코코아를 탈 수 있었기에 만족했다.
루드티아와 여기 사람 살아요
문 앞에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
또 폐가로 착각한 놈들인가? 잘 걸렸다.
해치면 안 돼요! 경찰을 부르세요!
응? 아니, 대용량 레시피가 떠올랐는데 너는 다 못 먹잖아. 사람이 필요해서.
해치면 안 된다니까요!
그 정도로 위가 터지진 않을 거야.
그의 집은 이 폭력적식사사건이 은밀하게 퍼져나간 이후 폐가 탐방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다. 경찰이 와 조사하였을 때 피해자는 옆구리가 아프고 호흡곤란을 호소했으나 단순한 과식이었고, 소화제를 처방받았다. 루드빅이 소화제 값을 지불해주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 됐다. 루드빅 역시 주거침입의 피해자였기 때문일까? 경찰은 싱거울 정도로 빨리 떠났다. 대신 티아나는 식어가는 남은 음식을 바라보면서 본인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루드티아와 "네 머리카락을 빗어주고 싶어…."
자는 중이라 산발이 된 상태로 누워있는 티아나를 보며 루드빅이 말했다.
그 말소리에 소름이 돋아 티아나는 눈을 번쩍 떴다. 침대 위를 기어 후다닥 루드빅에게서 멀어진다.
…왜 그런 톤으로 말하세요?
네 머리가 너무 쑥대밭이라서 나도 모르게….
제 방엔 왜 있으세요?
밥 먹으라고 깨우려다가… 네가 하도 못 일어나서.
아니, 그전에 내 집이고.
몇 시예요?!
7시 반.
아악! 티아나가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났다. 지각할 수도 있는 시간. 티아나가 일어나자 루드빅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방을 나갔고, 소파에 늘어져 티아나가 바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봤다. 작전 성공.
루드티아와 브로커
딸기를 어떻게 먹어야 좋을까.
우와. 딸기다.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잼도 만들고, 음, 뭐 이거저거.
어디서 이렇게 많은 식재료를 가져오고… 감당하시는 거예요?
비밀이지. 요리 좀 하는 사람들은 '브로커' 하나 정도는 둬야 한다고.
브…브로커?
말이 그렇고. 그냥 좋은 도매상 찾으러 다녀.
너도 나 있잖아? 응? 이거 봐, 사진 찍었거든?
어제 건너편 동네에 있는 산에서 찾은 생물인데….
…!?
루드티아와 나이먹기
애들이 근처에 엄청 많이 있네.
저쪽 학교에서 온 애들인가 봐요.
벌써 그럴 시즌인가?
음… 아직 좀 추운데 하나 봐요.
흐응~. 좋네~. 병아리처럼 따라다니는 모습이.
아이들 좋아하세요?
좋고 자시고 별생각 없어.
너도 저만할 때가 있었지?
그야 당연하죠.
보통 이런 숲으로 많이 오나?
추울 때는 벌레 없으니까 오고, 더울 때는 파릇파릇하니까 오죠.
숲이나 올레길 걷는 건 인기 코스잖아요.
잘 모르겠네.
안 해보셨어요?
해봤다고 해도 기억 못할걸.
저는 다 기억나는데…. 음….
아가씨, 나한테는 족히 25~30년 전 일일 거고,
너한텐 20년 전에서 15년 전 정도밖에 안 되잖아.
그렇게 말씀하실 때마다 되게 아저씨 같은 거 아세요?
그리고 아동기 때 기억은 나이 먹어도 잘 남는다고요.
아저씨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아저씨라고 하기에도 애매한걸.
마의 구간이야. 30대라는 건….
애들한텐 아저씨죠.
응….
너도 금방이야….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진짜 금방이야 이거….
이 우울한 분위기 뭐예요…?
나이 먹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에요.
알아…. 아는데 참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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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알도 알이다 라는 기분으로 적은 것이므로
아무래도 주의해주시길 바랍니다 미안합니다
조각글의 집합같은 느낌으로 쓰고 싶었는데 살짝 실패했어요
세계관이 오래 묶은 세계관이라 저만 알고 있던 게 나오는데 최대한 설명은 하였습니다
Endure
ㅤ 때는 아침.
ㅤ "이 계란은 뭐예요?"
ㅤ "응?"
ㅤ 티아나가 검지 끝으로 다시 가리킨다. "이거요."
ㅤ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짧뚱한 잔, 그 위에 세로로 세워진 계란. 껍데기 색은 하얀색.
ㅤ "계란이잖아." 루드빅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티아나가 곧장 그야 보면 안다며 허탈해한다.
ㅤ "뭐야~? 달걀컵(Egg server)이잖아."
ㅤ "생각보다 훨씬 대놓고 지은 이름이네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외국 영화에서나 본 거 같은데."
ㅤ "일단 위쪽에서 약간 아래 옆면을 나이프로 쳐서⋯."
ㅤ 탁탁 소리가 몇 번 나고 계란의 정수리에 골고루 금이 간다. 나이프는 금이 난 곳에 찔러 넣어져, 캔을 따듯 계란을 열었다. 내용물은 부드러운 반숙. 동그란 형상. 노른자를 둘러싼 흰자. 그 위로 약간의 소금과 후추가 뿌려진다.
ㅤ "그러고 먹어요? 숟가락으로 파서?"
ㅤ "그래도 되고. 난 빵 찍어먹으려고 둔 거야."
ㅤ 황금빛으로 구워진 길쭉한 빵. 루드빅은 그것을 하나 손끝으로 골라 집어 계란 안에 쑤셔 넣는다. 빵에 골고루 묻어난 노란색은 윤기가 난다. 굵게 떨어지며 끈적한 모습.
ㅤ "그냥 구워서 먹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ㅤ "그릇이 너무 넓게 더러워지잖아. 얘 하나만 더러워지면 그만이니까." 빵으로 계란을 두드리더니, 입으로 가져간다. 바삭한 소리를 한 번 내고는 다시 들리지 않는다. 입을 꾹 닫고 씹는다. 티아나가 의아한 얼굴로 달걀컵을 바라보았다가, 도로 루드빅을 바라본다. 루드빅의 눈동자와 노른자의 색이 닮았다고 느낀다.
ㅤ "키위 먹는 느낌이네요."
ㅤ "오, 키위 놓기에도 좋겠네. 닮았잖아."
ㅤ 티아나는 루드빅과 비슷한 방법으로 계란을 열고는 작은 숟가락을 비스듬히 엎드리게 했다. 흰자와 껍데기 사이에 파고들고는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파내려 간다. 이어서는 숟가락 가득히 삶은 계란을 퍼올리고 그것을 바게트 위에 올렸다. 역시 소금과 후추. 조심스레 베어 물고 바스락바스락 먹는다. 긴 테이블 위 머리가 열린 삶은 계란이 두 알. 흰 그릇이 두 개. 베이컨과 구운 방울토마토. 빵이 담긴 바구니, 바스러진 양상추 더미—샐러드—, 나이프와 포크가 한 쌍씩. 냅킨. 대칭.
ㅤ "계란은 닭이 먹는 모이에 따라서 색이 변한대요."
ㅤ "신기하네. 어느 쪽? 껍데기?"
ㅤ "노른자요. 껍데기는 암탉의 털색을 따라가고요."
ㅤ 시답잖은 대화가 오고 가는 활발한 식탁.
ㅤ 식사가 끝난 뒤는 각자의 시간이다. 티아나는 간만의 휴가를 누리고 있다. 연차로는 사흘 정도 될 것이다. 주말과 공휴일이 겹쳐서 닷새 하고도 잘하면 하루 더 쉴 수 있다. 그걸 들은 루드빅이 그에게 어딘가 여행을 가잔 제안을 했지만, 그와 여행을 했을 때마다 티아나 자신이 식도락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이번은 딱 잘라 거절했다. 따로 휴가 계획이 있기도 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거절된 순간 루드빅은 뭐라 말하기 어려운 묘한 표정을 지었다. 티아나는 그저 그가 조금 놀랐을 뿐이라 여겼다.
ㅤ 티아나가 소파에 기대어 창밖을 보던 중에 구두가 땅을 치는 소리가 다가왔다. 루드빅이다.
ㅤ "어라? 나가세요?"
ㅤ "아, 얼마 전에 의뢰 상담이 하나 들어왔었는데, 오늘 오라고 하네. 급한가 봐. 당일 처리를 요구하면 좀 늦게 들어오려나⋯."
ㅤ 평소보다 단정한 차림새다. 티아나는 그가 중요한 고객이라도 만나는 것인가 생각한다. 루드빅은 구두 끝을 한참 어루만지고는 흠이 없음을 보고 만족했다.
ㅤ "몇 시쯤 들어오시는데요?"
ㅤ "몰라. 늦으면 연락할 거니까."
ㅤ "아⋯ 근데, 저 오후에 본가에 가려고 했어서요."
ㅤ 문고리를 잡으려던 그의 손이 멈췄다. 루드빅이 어깨너머를 보려는 듯이 살짝 뒤돌아 본다. 둘은 눈이 마주친다. 잠시 침묵이 자리 잡았다가, 루드빅이 입을 열었다.
ㅤ "⋯태워다 줘?"
ㅤ "음? 저녁까지 일할 수도 있다면서요?"
ㅤ "의뢰 시작 시간은 어느 정도 자유니까 말이야. 이번에 갈 사무소가 네 본가 가는 길 쪽에 있어. 대충 핑계 대고 갔다 오면 되거든."
ㅤ "아⋯."
ㅤ 그는 루드빅이 사무소까지 자기를 끌고 가려는 듯해서 대답을 머뭇 거린다. 그렇지만 이미 짐은 챙겨뒀었고, 딱히 지금 차림새에서 밖을 나가도 문제는 없어 보였기 때문에—그는 루드빅이 집에서 쉬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놓고 편한 옷을 입을 사이는 아니니,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나갈 때와 다름없는 옷이었다.— 곧 고개를 끄덕인다. 차 트렁크에 짐을 실으면 몸은 편할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한다. 루드빅이 살짝 웃는다.
ㅤ "짐 가져와. 실어줄게."
ㅤ 그런 말을 뒤로 루드빅은 현관문을 열어두고 차고 쪽으로 걸어갔다.
ㅤ 사무소에 도착한 시간은 맑고 화창한 오후. 둘은 가는 길 중간에 점심 식사를 하였다. 밖은 살기 좋은 온도였다. 반대로 사무소 안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겉보기엔 높은 가벽이 빼곡한 카페 같다. 창문으로 맑은 빛이 들어올 수도 있겠지만, 주광색의 조명이 빼곡한 천장 때문에 일절 은혜는 받지 못한다. 넉넉한 공간과 반투명한 유리가 붙은 분리가벽. 소곤소곤한 듯 웅성거리는 듯 소란스러운 듯 각각 떠드는 소리. 공기정화기와 냉난방 시설의 소음. 불현듯 전화 소리. 누군가가 받고 살가운 척 목소리를 높인다.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협소한 가벽 안에서 의뢰인과 대화하는 루드빅과 경청이라는 침묵으로 일관 중인 티아나.
ㅤ "그래서——— 말씀하신 사항은 자택 근처 출현한 이계생물의 퇴치고⋯."
ㅤ 루드빅은 창백한 서류 몇 장을 마치 수십 장이라도 되는 듯 넘기고, 다시 넘기고, 도로 돌아왔다가, 또 넘기며 읽었다. 형식만 갖춘 경어가 그의 입에서 나온다. 목을 몇 번 가다듬고,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목소리. 티아나는 속으로 신선함을 느꼈다.
ㅤ "제안 의뢰비 50⋯ 너무 많아. 어르신, 이 정도 의뢰에는 40으로도 충분해요."
ㅤ "어머⋯ 정말요? 주변에 다들 그 정도 줬다길래⋯."
ㅤ "네에, 예전 얘기. 제가 또 싸게 받는 편이라."
ㅤ 책상에 놓여있던 값싼 볼펜으로 단호하게 의뢰비 영역에 두 줄이 그어지고, 약간 남아있는 빈칸에 가격이 새로 적힌다. 수려하지만 어딘가 약간 어색한 글씨체. 분명 아직 연습이 남아있는 글씨. 티아나는 은근슬쩍 머릿속에서 자기가 내야 했던 의뢰비를 예상한다. 단골이 된다고 해서 가격이 그렇게 내려가진 않겠지. 분명 수십 건은 될 텐데. 그 생각 잠시 사색이 되었다가, 대화에 다시 집중한다. 보통 의뢰는 두 명의 해결사가 처리하니, 50이라는 숫자에서 세금이라느니 뭐니 해서 떨어져 나가고 남은 돈을 반 씩 가진다면 그렇게 많진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보자면 오히려 (두 명인 척을 하고) 혼자서 40을 부르는 루드빅 쪽이 더 비싸지만, 의뢰인 입장에선 둘이 하든 하나서 하든 원하는 결과물은 똑같다. 총액이 좀 더 싸고 잘하는 사람이 걸리면 그만이다.
ㅤ "금액은 수정했고, 오늘 작업은 시작할 건데— 계약금은 사무소에 할당하셨을 거고, 완료 보고를 받고 난 뒤는 사전에 받으신 쪽으로 결제하시면 됩니다."
ㅤ 외운 문장.
ㅤ "고마워라, 아이고, 아들 딸 같은데 너무 고맙네."
ㅤ "하하⋯." 루드빅이 거북하게 웃었다.
ㅤ "특히 청년 말이야, 내 아들이랑 눈이 꼭 닮아서, "
ㅤ 서류를 내려놓다가 붙잡히는 루드빅의 두 손, 뿌리치진 않고 느슨하게 의뢰인의 손에 잡혀있다. 티아나는 루드빅의 손보다도 의뢰인의 얼굴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늙은 머리가 듬성하게 자란 검은 머리칼⋯. 고르게 퍼진 색을 보아 염색이었다. 적은 숱에 짧은 머리. 주황색인지 노란색인지 모를 눈동자에, 둥근 동공.
ㅤ "눈이 닮았다고요."
ㅤ 루드빅은 기계적으로 답했다.
ㅤ "맞아~. 밝은 노란색이었거든. 아휴 청년'은' 되게 곱게 생겼네. 우리 애는———"
ㅤ 노란 원 위 강렬하게 축소된 세로선.
ㅤ "그런 걸 뭐 하러 말해."
ㅤ 의뢰인이 다시 입을 떼려던 순간,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얘기만을 듣던 다른 중년이 한 마디 쏘았다. 의뢰인이 안 좋은 계약을 당할까 봐 따라온 태도다. 중년은 팔을 풀지 않고 엄지 하나로 손가락질하며 루드빅을 가리킨다.
ㅤ "눈 노란 거 말고는 닮은 곳이 하나도 없구먼. 어디 바람잡이 같이 생겨서는."
ㅤ 티아나는 이때 등에 소름이 돋았다.
ㅤ "아⋯ 아하하." 루드빅의 목소리가 달그락 거리다가 부드럽게 웃는다. 티아나가 약간 안도한다.
ㅤ 호소, 답변, 중재, 헐뜯음, 난색(難色), 어색한 웃음, 빙글빙글 도는 대화. 아들은 대학 다니던 중에 연락이 끊겼다, 꾸밀 줄을 모른다, 아들은 인물이 없다. 무슨 소리냐, 우리 애가 훨씬 낫다. 어디가 낫다는 거냐. 봐라, 얘는 키도 크고 날씬해서. 머리도 까만 게 관리도 못해서 부스스하니. 그건 네 머리를 닮아서 그런 거 아니냐. 쌍꺼풀도 없어선, 먹는 것도 이상해서, 입술은 너무 얇고, 우울한 얼굴에. 그만 좀 말해라. 다 너 닮아서, 의뢰 와놓고 무슨 소리냐. 미안해 청년, 엄청 곱게 생겼네, 이러는 거 알면 우리 애가 질투하겠어. 의뢰인들은 입술을 들썩대며 말했다.
ㅤ 루드빅은 저 둘의 이빨을 전부 뽑아버리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서 웃었다. 티아나는 눈을 굴리며 대화를 좇다, 슬쩍 손목시계를 본다. 루드빅이 곁눈질로 그를 바라보았다가 의뢰인에게 시선을 돌리며, 다시 환하게 웃는다.
ㅤ "하하, 그러지 마시고, 저흰 시간이 되어서 슬슬 의뢰에 투입할 준비를 하려고 합니다. 생태 조사가 필요해지면 오래 걸릴 수 있어서 빨리 시작하는 게 좋거든요."
ㅤ 능숙한 변명이다. 잡힌 두 손이 스르륵 빠져나오고 오른손만을 도로 내민다. 악수. 의뢰인은 그의 손을 동아줄이라도 잡는 것처럼 두 손으로 꼭 잡고는 손을 흔들었다. 잘 부탁드려요. 그리 말하고는 자리를 뜬다. 가벽 내에는 티아나와 루드빅만이 남았다. 의뢰인이 일어난 자리를 바라보는 그의 노란 눈동자는 감을 줄을 모르고 초침처럼 움직였다.
ㅤ "⋯ ⋯."
ㅤ "⋯저희도 출발할까요?"
ㅤ 공기를 깨고 들어오는 목소리.
ㅤ "⋯볼일 좀 보고 올 테니까, 서류 좀 가방에 넣어놓고, 차 앞에서 기다려."
ㅤ "에? ⋯아! 네. 갔다 오세요."
ㅤ 이젠 정말 부려먹네, 티아나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다. 다만, 어딘가 그의 표정이 나쁜 탓에 뭐라 불만스럽게 대할 순 없었다. 거북한 일이라 그러겠지. 딱히 사람을 좋아하시는 것도 아니잖아. 아들이랑 닮은 구석이 하나 있다고 그렇게까지. 그래도 나쁜 분들은 아닌 거 같았는데. 그러고 보니 루드빅 씨는 얼굴을 고쳤다고 하셨는데⋯. 대학교를 중퇴⋯ ⋯. 뭐람, 얼른 하자.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서류를 가방에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ㅤ 티아나가 차 앞에서 기다린 지 10분 조금 지나자 루드빅이 멀리서 걸어온다. "기다렸지." 삑, 자동차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 티아나는 서류 가방을 든 채 조수석에 앉는다. 루드빅이 몇 번 기침을 한다. 티아나는 인위적인 박하향을 느꼈다. 안전벨트를 다 두를 때까지도 루드빅은 헛기침을 했다. 사무소에 있을 때보다 기침이 더 심하다. 약간 젖은 기침이다.
ㅤ "괜찮으세요?"
ㅤ "으음, 목이 불편해서."
ㅤ "⋯아는 분들은 아니죠?"
ㅤ 침묵. 루드빅의 고개는 움직이지 않는다.
ㅤ "모르는 사람이야. 아마도? 전에 의뢰한 적이 있었을지도 모르지. 왜, 내가 그 아들을 알까 봐?"
ㅤ "아⋯ 아뇨, 그냥⋯."
ㅤ "아님 내가 그 못난 아들을 잡아먹기라도 했을까 봐?" 쇳소리 섞인 목소리. 루드빅은 다시 억지로 기침을 했다. "헤헤." 그의 웃음소리가 말끝보다 뒤늦었다.
ㅤ 차에 시동이 걸리며 내비게이션에 빛이 들어왔다. "주, 주소 찍을게요." 티아나는 다급한 손가락으로 주소를 입력한다. ■■길, ■■■번 ■■⋯. 분명 그가 이미 주소를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성스럽게 적어 넣어준다. 그러든지 말든지, 루드빅은 자신의 턱 주변에서 차가움을 느꼈다. 묻어있는 물기를 몇 번 소매에 쓱 닦는다. 혀로 자기 치아 곳곳을 점검하듯 훑어보고, 또 얕은 기침을 한다. 티아나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적는 동안 그 손목 아래로 루드빅의 팔이 교차하며 기어를 잡는다.
ㅤ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ㅤ "⋯사과하라고 한 적은 없어."
ㅤ 안내를 시작합니다, 상냥한 말투로 내비게이션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도로 재생한다. 그것을 신호로 루드빅은 액셀을 살근 밟는다. 핸들이 꺾이고 그에 따라 차가 몸부림치는 대로, 우레탄 바닥은 마찰력에 응답하여 괴성을 낸다.
ㅤ 차 속은 조용했다. 티아나의 눈에 비친 루드빅은 어쩐지 힘이 빠진 모습이었다. 배가 고파 보인다.
Grudge
#1
ㅤ 티아나를 그의 집으로 데려다주고, 곧장 일터로 복귀한 루드빅은 누가 뭐라 할 수 없을 수준으로 의뢰를 마쳤다. 목표물을 찾느라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좋은 사냥꾼이고, 어쨌든 오늘 끝냈다면 그만이다. 그가 좋은 식사라도 한 듯한 멍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숲에서 걸어 나오자, 의뢰인이 환하게 반겨줬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좋았다. 의뢰인이 그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싶단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괜찮다며 거절하곤 그 의뢰인과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선물이라며 퇴치한 이계생물의 머리를 건네었다. 의뢰인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그 머리통을 떨궈 놓고는, 두 중년이 당황하는 소리를 무시하고 곧장 그는 그의 집으로 향했다. 온기가 없는 넓은 집.
ㅤ 그가 손을 씻으며 거울에 비친 본인을 한참 바라본다. 티아나는 루드빅의 집에 거울이 너무 드물게 있다고 나무랐다. 어찌어찌 차려입어도 꼴을 알려면 방에서 나와 다른 방까지 갔어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욕실과 화장실에 있는 거울도 당최 충분한 크기가 아니었다. 루드빅의 방에는 거울이 없다. 눈 뜨자마자 자기 얼굴을 보게 되는데 이상하지 않냐면서. 옷방에 있는 거울은 옷장 중 하나를 열면 나타났으나, 폭은 한 뼘 반. 티아나는 그 거울로 종아리부터 정수리까지 겨우 다 볼 수 있었지만, 루드빅을 기준으로 한다면 반드시 얼굴 중앙쯤을 끊어 먹는 길이의 옹색한 거울이었다. 적절한 거울이 없는 이유를 물을 때마다, 그는 시원찮은 반응을 보였기에 결국 티아나는 본인 방에 따로 거울을 구비해 뒀다.
ㅤ 루드빅은 세면대 거울에 가까이 다가가, 아직 젖은 손으로 자기 눈꺼풀을 까뒤집어 거울과 눈을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맑은 노란색이다. 흰자는 충혈이나 점 같은 것 없이 하얗다. 결막도 건강한 분홍색이다. 그러나 어딘가 불만족스럽다는 듯이 그는 계속 바라본다. 바라보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그만 손톱 끝이 눈알을 건드려버렸다. 그는 소리 없이 입만 벙끗 열었다가, 치아 사이로 숨을 들이마신다. 손을 급하게 뗀다. 오른눈을 질끈 감으니 자기 눈물에 속눈썹이 젖는 것을 느꼈다. 그러곤 괜히 신경질에 자기 머리끝을 헝클어뜨리고, 씻어야겠다, 그리 생각한다.
ㅤ 그는 머리가 물에 젖은 꼴로 나와서도 저녁 식사가 고민이었다. 뭐가 좋을까. 지금 걘 가족들하고 먹고 있겠지. 좋네~. 슬리퍼를 끌고 그는 주방 싱크대에 등을 기댄다. 냉장고 소리가 음산하게 공간을 메우고 있다. 루드빅은 주방에서 거실 쪽을 바라보다가, 냉장고로 향한다. 계란을 빨리 처리해야한다. 저녁 메뉴가 정해졌다. 파스타. 노른자와 딱딱한 치즈를 섞은 소스로 맛을 내는 쪽으로. 그는 면을 삶으며 계란을 깼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노른자가 담기고, 그 후에 차례차례 재료가 섞인다. 프라이팬에 잘게 썰린 염장된 돼지고기가 볶아진다. 검은 촉수가 자유롭게 움직이며 한 번에 여러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어째 섞이고, 볶아지고, 끓고 있는 것들을 내려다보면서도 즐겁거나 기대되거나 하지 않았다. 낯선 기분은 아니었다. 간만에 느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는 이런 기분이 된 원인이 여기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심 알고 있었지만, 메뉴를 잘못 선택했나, 그렇게 생각하였다.
ㅤ 맛은 만족스러웠다. 그는 식사를 마치고 싱크대에 아침 식사 후 남은 것들이나, 조금 전 요리하며 생긴 쓰레기를 디스포저에 처리하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싱크대의 배수구가 거름망 하나로 막은 시커먼 입을 벌리고 가운데 자리에 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왼쪽 바닥을 향해 그것들을 떨궈버렸다. 곧 시커먼 목구멍과도 같은 것이 솟아올라 그 부산물을 집어삼킨다. 편리하다. 손 젖을 일 없고 편하다. 이렇게 남은 것들을 먹어버린다면 나는 남은 것들로도 변하게 되는 걸까? 노른자는 모이가 무엇인지에 따라서 색이 달라진댔지…. 그는 문득 생각했다가, 먹는 것에 따라 육체나 부산물이 변한다니, 그건 '모든 생물'이 똑같잖아. 오우, 이런 어휘는 걔한테서 옮은 것 같아. 그러곤 멈췄다.
ㅤ 밖에서 벌레 우는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내다보면 완전히 어둠이다. 조금 멀리 있는 곳에 있는 산책로의 가로등 정도가 그나마 길을 밝힌다. 겨울에 해가 더 짧아지기 전에 조명을 더 설치할까. 밤에 오는 길이 무섭겠어. 추워서인지 무서워서인지 모르게 달달 떠는 모습도 조금 보고 싶은걸…. 그가 짓궂은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몸을 뉜다. 그렇게 하루를 저물게 하였다.
#2
ㅤ 티아나가 본가로 가기 며칠 전, 루드빅에게는 한 의뢰가 들어왔었다.
지급비 7 / 2시간 진행 / 변신 관련 이능력 소유자 환영 / 다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의 고유 종교인 마히카교의 대표적인 기념일 '재성절(再聖節)'을 기반으로 한 이벤트 진행. '재성절'은 신 중 하나인 '아흐라'가 악귀 '라크샤'를 물리쳐 다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온 날을 기념하는 날로… ….'
… …
… 라크샤로 변장해서…
… … … … 보육원의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시고 … …
… … 저희 보육원은 … … 성탄절 … … 탄신일 등 다양한 … 존중 …
ㅤ 이런 걸 나한테 준 사무소는 뭐지. 루드빅은 노트북에 띄운 의뢰서를 읽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잠깐, 티아나를 데려가면 좋겠는데. 걘 애들을 껄끄러워하지도 않을 거고. 어쩌면 변할 모습에 조언을 얻을 수도 있겠지. 어차피 여행도 거절됐고. 그런 생각을 하며 미리 의뢰를 수락했으나, 알다시피 계획이 틀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도로 거절하고 싶어도, 그런 짓을 해버리면 나중에 의뢰받기가 어려워진다. 꼴랑 이 사람 하나만 자기한테 실망하면 좋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루드빅은 그런 생각에 어쩔 수 없이 원래라면 한가로울 오후 시간에 의뢰를 준 보육원으로 향했다.
ㅤ 보육원 선생 중 하나가 루드빅을 맞이한다. "그 해결사 분…이시죠?"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온다. 루드빅은 어깨를 한 번 으쓱 올렸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악수. 루드빅은 악수하는 상대방의 손에 힘이 영 없어서 기분이 언짢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서 그 선생은 루드빅을 한 번 더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았다.
ㅤ "뭔가 문제라도…."
ㅤ "아, 아뇨." 아무리 보아도 이런 일을 맡을 거 같지 않은 사람이 온 거 같다는 속마음을 숨기는 모습이다.
ㅤ 루드빅은 보육원 안 교무실 구석 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다리가 네 개 달린 스툴. 루드빅이 앉자 묘하게 앞뒤로 달캉 거린다. 그는 무표정하게 스툴을 흔들의자처럼 까딱거리며 선생들을 기다린다. 5분 정도 기다렸나 싶을 때쯤에 어른 두 명이 루드빅 쪽으로 목례를 보낸다. 한 명은 앞치마를 둘렀고, 한 명은 청바지를 입고 있다. 루드빅이 고개를 까딱 움직여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런 인사치레가 끝나고 곧장 질문이 들어온다. "뭐 하러 오셨는지 아시죠~." 앞치마를 두른 쪽이 애굣살만 실컷 올려 웃으며 말했다.
ㅤ "라크샤…였던가. 그거 역할을 맡아달라고…."
ㅤ "네 맞아요~. 혹시 관련해서 지식이 있으실까요~?"
ㅤ 없다. 그러나 단호하게 잘라 말하면 알아보지도 않고 온 거냔 눈을 할 것이다. 그렇게 낯선 종교도 아니었다. 루드빅은 양 입꼬리만 살짝 올려 웃으며 말한다. "어느 정도 외형은 알아보고 왔는데…. 자세한 신화는 모르네요."
ㅤ "그러실 수 있어요~. 우리나라는 또 종교가 자유롭다 보니까 많이 섞여 있어서… … … … 라… …였으니까…."
ㅤ "아~. 네."
ㅤ "…… 고, ……라서…." 루드빅은 필요 없는 대화를 반쯤 흘려듣고 있다. 억지로 웃으면서 이해한다는 듯이 떠벌떠벌 말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거슬린다.
ㅤ "일단 중요한 건… 라크샤가 조금 복잡한 모습이신 거 아시죠~." 앞치마를 입은 쪽이 잠시 웃는 것을 멈추고 스마트폰을 두들긴다. 한참을 뒤적거린 후에 스마트폰을 루드빅에게 들이밀며 다시 눈만 한껏 반달로 만든 웃음으로 이야기를 잇는다. 화면에는 특이한 그림이 있다. 라크샤다. 인간처럼 이족보행 하는 신체 구조, 염소의 발굽, 매의 발 같은 손이 두 쌍, 깃털로 뒤덮인 몸에, 사람과 새 중간쯤의 기묘한 머리통. 꼬리는 없고, 망토처럼 늘어뜨린 날개가 있다. 눈은 마치 카멜레온의 눈꺼풀을 벗겨버리면 이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크고 기괴하다. 루드빅은 가만히 바라보다가 한 마디 했다.
ㅤ "이런 걸 어린이한테."
ㅤ 청바지를 입은 선생이 이마를 짚었다.
ㅤ 그러고는 셋의 고군분투였다. 루드빅이 처음 변신한 형태가 '어린아이들의 정서에 안 좋을 정도로 공포'스러웠기 때문에, 두 선생은 계속해서 '컨펌'했다. 그중엔 조금만 더 가짜같이 변할 순 없냔 요구도 있었지만, 루드빅은 에둘러 말하듯 안 된다고 했다. "직접 본 것들을 기준으로 밖에 못 변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수많은 요구에 표정이 안 좋아진 루드빅이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인간의 얼굴이 거의 남지 않은 형태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안심할 만한 형태로 변했지만, 역시 어른에게도 조금 무서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화난 듯 털을 잔뜩 부풀린 닭과 같은 머리, 조류의 비늘 같은 피부가 무섭단 이유로 깃털을 길게 만들어 팔을 가렸다. 털색이 붉으락 푸르락하며, 날카로운 발톱이 엿보인다. '그냥 원래 잘하던 모습으로 있었어도 좋았을 거 같은데.' 그는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선생은 나름 만족한 얼굴로 루드빅을 아이들이 기다리는 곳까지 안내했다. 단단한 발굽이 대리석 바닥과 닿는 소리가 복도를 채운다.
ㅤ 그들이 루드빅에게 전달한 내용은 간단했다. 보물 찾기를 할 것이다. 당신이 술래인 술래잡기도 같이 있다. 중간쯤에 신호를 주면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겁을 주며 뛰어놀게 하라. 어느 정도 애들이 지친 기색이 보이면 노란색 구슬 목걸이를 한 선생님과 아이들이 와서 당신을 '해치울 것'이다. 죽은 척을 하면 다른 선생이 애들을 내보낼 테니 그때 나오면 된다. 그것이 전부였지만, 그가 아이들과 뛰어노는 모습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어린아이였던 적이 없던 사람처럼 엉거주춤하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그는 '이제 알겠다.'라는 말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좀 더 활발하게 그에게서 도망치며 보물을 찾기 바빴다. 어색한 금색으로 칠해진 메달들이 뛰어다니는 아이의 손에서 반짝거렸다. 즐거운 듯 무서운 듯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비명 속에서 유일하게 한 아이가 루드빅 앞에 우뚝 서서 그 두 눈을 들여다봤다. 아직 제대로 발달하지 않은 얼굴 근육은 개나 고양이에게서 볼 법한 표정이다. 루드빅은 이 아이가 몇 살인지 모르겠다. 루드빅은 무릎을 약간 구부려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ㅤ "보물 찾으러 가야지, 잡아먹는다?"
ㅤ "저는 이미 찾았으니까 다른 애들이 찾아야 해요."
ㅤ "몇 개고 찾을 수 있을 텐데?"
ㅤ "찾으면 기쁘잖아요."
ㅤ 아이는 두려움 없이 말했다. 루드빅은 고개를 갸우뚱 비틀었다가, 도로 아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ㅤ "너는 날 안 무서워하는구나, 비결이 뭘까, 도련님?"
ㅤ "그야 아저씨는 가짜니까요."
ㅤ "가짜라."
ㅤ "엄마가 가짜랑 바보에 무서워할 이유는 없댔어요!"
ㅤ 한껏 소리를 높인 아이는 루드빅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재빨리 뒤돌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도망쳤다. 곧 아흐라와 아흐라의 부대 역할을 맡은 선생 한 명과 아이들이 달려와, 그의 몸에 말랑말랑한 방망이를 휘두른다. 루드빅은 이때구나 싶어 어설픈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아이들이 환호한다. 보육원 선생들이 박수를 치며 아이들을 어딘가로 인도한다. 그 선생 무리 중 한 명이 루드빅에게 와서는 박수를 치며 감사하단 말을 남긴다.
ㅤ 루드빅은 수업 중인 곳에서 아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어느 뒤편에서 변신을 풀었다. 청바지를 입은 선생이 와서는 생수병을 건네었지만, 그는 됐다며 손을 가볍게 펴 거절했다. 사실 무척 목이 마르다. 얇은 벽 너머로 수업 소리가 들린다. "라크샤는 사람을 잡아먹는 악귀로⋯." 루드빅은 그런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구석에 놓인 거울을 보며 어딘가 이상한 구석이 없나, 본인의 모습을 점검한다. "본디 신성하게 여겨지는 검은 닭의 모습이었으나⋯" 머리카락을 보던 중 그는 검은 머리카락 하나가 섞여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손가락에 둘둘 말고는 뽑아버린다. 뽑아버릴 필요는 없었지만, 그저 꼴 보기 싫었다. "아흐라는 라크샤를 본인의 피조물이니 아껴주었지만⋯." 루드빅은 뽑힌 검은 머리칼이 자기 손가락을 감아 얽매여 있는 것을 내려보았다. "라크샤는 아흐라가 칭송받는 것에 질투하여 그의 신도들을 먼저 잡아먹다가⋯." 그는 엄지와 검지를 비벼 머리카락을 바닥에 내던졌다. "아흐라가 목에 두르고 있던 황금 원판에 비친 본인의 괴물 같은 모습에 놀란 라크샤를 아흐라가 물리쳤습니다⋯." 루드빅은 괜히 자신의 뒷통수를 헝클었다. "그러자 라크샤는 본인의 팔을 시작해서…."
ㅤ 루드빅은 보육원에서 스스로를 쫓아내듯 나와버렸다.
#3
ㅤ 티아나의 핸드폰이 협탁 위에서 진동한다. 딱딱한 것끼리 부딪히며 나는 불쾌한 소리에 티아나는 눈이 떠졌다. 시간은 오전 9시를 약간 넘었다. 더듬더듬 핸드폰을 집어 들어 바라본 화면은 루드빅의 전화를 알려주고 있다. 티아나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ㅤ "여보세요."
ㅤ "… …."
ㅤ "여보세요? 루드빅 씨?"
ㅤ "아, 여보세요."
ㅤ 전화기 너머에서 잡음 섞인 한숨소리가 들린다. 안심이었다.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요?"
ㅤ "아… 별게 아니라, 방 청소해도 되나 싶어서."
ㅤ 그런 걸 물어보실 줄은. 티아나는 내심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흔쾌히 "물론이죠. 감사해요."라는 말로 응한다. 전화기 너머로 루드빅이 웃는 소리가 들린다.
ㅤ "지금 뭐 해?"
ㅤ "일어났어요."
ㅤ "아, 미안. 방해했네."
ㅤ 말이 끝난 직후 침묵이 늘어진다.
ㅤ "아."
ㅤ 티아나는 거북한 기분이 들어서(어쩌면 그냥 이렇게 전화를 끊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를 불러 세우듯 정적에 파고들었다. 대답은 없고, 그저 전화가 끊어지지 않은 상태로 조용하다. 1분도 되지 않아서 대답이 돌아온다. 그저 "으응?" 하고 앓듯이 내는 소리가 끝이었다.
ㅤ "잘 지내고 계시죠?"
ㅤ"못 지낼 건 없지? 너야말로?"
ㅤ "저도 잘 쉬고 있죠."
ㅤ "그럼 됐군."
ㅤ "…문자를 웬일로 안 보내셔서 한 번 물어본 거예요."
ㅤ "아? 아~. 그냥. 이틀 연속으로 일이 있어서 그랬어. 어차피 시답잖은 거 보내면 안 읽잖아."
ㅤ"안 읽는다고 안 보내실 건 아니잖아요." 티아나는 침대에 엎드려 베개를 끌어안고 얘기했다. 핸드폰 너머가 조용하다.
ㅤ"…심심해~." 앙탈 부리는 목소리로 루드빅이 말했다. 전화 너머 그는 지금 티아나의 방에 있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 오른손으로 전화를 들고, 왼손으로 무언가를 굴리며 만진다. 상앗빛의 작고 들쭉날쭉한….
ㅤ"혼자서도 잘 노시잖아요!"
ㅤ티아나가 성을 냈다. 루드빅이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티아나의 핸드폰에서 들린다. 직후,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 루드빅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곧 "네~!" 라고 멀찍이 대답하는 티아나의 목소리로 누군가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직감한다. 이제 슬슬 끊어야겠네.
ㅤ"부모님이 밥 먹으라고 하시네요."
ㅤ"응, 맛있게 먹어. 끊을게."
ㅤ예상보다 고분고분한 태도에 티아나는 잠깐 눈을 굴린다. 그러려니. 그러곤 역시 "네."라고 대답한다. 전화는 바로 끊겼다. 티아나는 핸드폰을 협탁에 도로 내려놓았다. 무언가 찜찜하다. 이상한 짓을 하고 계시진 않겠지? 방을 엄청 특이하게 꾸며놓고 청소 해놨다고 한다든가…. 방 구석구석 이상한 장식을 숨겨둔다든가…. 그냥 난장판이 된다든가…. 여러 시나리오를 생각해 본 티아나는, 이왕이면 이상한 장식을 숨긴 쪽이 찾는 재미는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상상했다.
ㅤ티아나는 루드빅의 집으로 거처를 옮기며, 이주하는 이유와, 부모님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한 적이 있다. 앞길을 통제하려고 안달이 난 타입의 부모는 아니었으니 '설득'을 목적으로 한 설명은 아니었다. 삶을 공유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가 거처를 옮긴 이유는 그저 '더 좋은 샘플을 얻을 수 있으며', '루드빅이 전적으로 살림을 맡아서', '개인적인 연구에 몰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출퇴근이 그리 편리하진 않다. 마을에서 얼마 안 떨어진 숲이지만 그래도 숲은 숲. 쭉 가로질러 간다면 다른 마을이 나온다지만, 어지간해서는 숲 외곽에 있는 도로에서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이득.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활비를 아끼면서 개인 공간이 늘어난다는 점이 이점이었다. 루드빅이 생떼를 쓰듯 오라고 한 것도 이유였지만.
ㅤ그렇지만 '동거인'인 루드빅은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직업인 '해결사'는 말하기 쉬웠다. 그러나 평소 무엇을 하며 지냈고,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인지는 말할 수 없었다. 걸러낸다. 걸러내고, 걸러내고, 걸러낸다. 거짓말도 섞을까.
ㅤ"샘플 구하는 의뢰를 맡기려다가 그냥 도와주신 후로 친해졌어요…! 요리하는 걸 좋아하셔서 식사에 초대 받다보니…. 자취할 곳 필요하면 오라고…."
ㅤ그렇게 틀린 말은 없다. 부모님은 그러려니하며 복잡하게 캐묻지 않는다. 말하고 싶으면 더 말하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ㅤ티아나는 아침 식사를 위해 본인의 방에서 테이블이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의 부모 중 한 쪽이 넌지시 말한다. 아침부터 누구와 통화했느냐고. 티아나는 그저 그게 루드빅이라고 말했다. 다른 한 쪽이 묻는다. 남자란 얘긴 없었다면서. 티아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의자에 앉았다. 거짓말이었지만, 또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기에, 티아나의 표정은 애매모호했다. 입이 가로로 길게 뻗으며 웃는 둥 마는 둥 하다. 곧 자기 앞에 내려놓아진 그릇을 보고는 "잘 먹겠습니다." 그리 말했다. 삶은 계란을 다진 고기로 감싼 후 가볍게 튀겨 만든 요리. 티아나는 나이프로 요리를 반 갈랐다. 그릇에 노른자가 흘러내린다.
ㅤ루드빅 씨는 밖에 드러내기 어려운 사람이란 말이지.
ㅤ내심 티아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ㅤ루드빅은 티아나의 방에서 깨진 거울과 갖은 잔해들을 깔끔히 치우고, 새 거울을 구해 세워두었다.
#4
ㅤ 오늘은 그에게도 별일 없는 휴일이다. 오래간만에 들린 곳은 카페. 뜨거운 블랙커피를 하나 시켜놓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디저트도 시키지 않았다. 그냥 시간을 버리는 것이다. 유리벽을 사이에 하나 두고는 거리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거나 관찰한다. 지겹다. 지겹다가도 볼만하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있는 건 귀하다. 그러니 그냥 집에서 뒹굴고 있는 연예인 따위가 방송되는 것이 인기를 사는 것이겠지. 배울 것이 하나 없는 겉치레에 사실은 대본대로 굴러가는 것인데도 말이야. 생긴 것만 괜찮다면 조금 추잡하게 굴어도 애교로 봐 준다고. 루드빅은 그렇게 생각했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간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들개도 하나 지나갔다. 커피는 다 식었고, 아직도 해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루드빅은 계속 의자에 앉아 차가울 정도로 식은 커피를 마시는 척하고 있다.
ㅤ 조금 멀리 떨어진 테이블에서 시끄러울 정도로 떠드는 청소년들이 있다. 다른 테이블에는 귀를 꽉 막고 노트북이니 종이책이니 여러 네모나고 평평한 것들을 펼쳐놓은 부류가 있었고, 어디는 오랜만에 만난 모습인지 도란도란 이야기하거나, 어딘 그저 루드빅처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차를 마시는 사람도 있었다. 루드빅은 볼 게 없어 커피잔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머그컵 속 검게 들어차 있는 표면에 그의 얼굴이 엷게 비친다.
ㅤ 오래전부터 쭉 혼자 잘 지냈는데,
이번에는 왜 느낌이 다르지.
ㅤ 아주 건너편 테이블에서 한 말이 그의 귀에 꽂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의 뒤통수가 보인다. 검은 머리였다…. 루드빅은 살짝 몸을 틀어 그 사람의 정면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보려 했다. 약간의 반사만 있다면…,
ㅤ 그 순간 어디에선가 강렬한 섬광이 눈을 찌른다. 루드빅은 목소리는 내지 않고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젊은 애들이 있는 테이블 쪽이었다. 그 무리 중 하나가 들고 있는 손거울이 번쩍거린다. 햇빛인지 조명인지 모를 빛을 반사하고 있다. 루드빅은 손바닥을 펴서 가볍게 빛을 가렸다. 손거울을 든 학생 앞에 앉은 학생이 그것을 보고는 넌지시 말했다. "야! 조심해! 저 아저씨 눈에 쏘고 있잖아!" 손거울을 든 학생이 다급히 뒤돌아보더니, 고개를 까딱한다. 루드빅은 그것을 곁눈질로 보다가, 고개를 까딱하고는 도로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다. 조금 전의 뒤통수는 그 테이블에 없다…. 루드빅은 식은 커피를 다 마셔버린다. 밑에 가라앉은 시럽이 괜히 그의 목을 갑갑하게 한다. 그는 테이블에 있던 물통을 잡았다가, 휙 하고 허망하게 들어올려지는 것을 보곤 기분이 망가졌다. 비어있잖아….
ㅤ "아, 저기요." 그는 약간 손을 들어 지나가던 직원을 불렀다.
ㅤ "네~ 필요한 거 있으실까요?" 직원은 웃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ㅤ "여기 테이블에,"
ㅤ 순간 그의 목소리가 갈라진다. 루드빅의 기분도 같이 갈라져버렸다. 카운터 직원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루드빅은 말을 잠시 멈췄다가 괜히 기침을 한다. 고기로 된 빨대 주제에…. 그런 식으로 제 목을 한 번 탓했다가, 그는 말을 이었다. 한결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ㅤ "…테이블에 물이 없어서요."
ㅤ "아, 채워두겠습니다. 따로 필요하신 건요?"
ㅤ 없어요. 카운터의 직원이 그 말에 끄덕인다. 곧 기다리니 다른 직원이 얼음이 가득 찬 유리잔 하나와 또 다른 물통을 가져와 테이블에 두었다. 필요한 건 없다고 했었는데. 창밖을 바라본다. 거리에 사람이 안 보인다. 그는 조금 전에 빛을 맞은 오른쪽 눈이 아직 시큰시큰하다고 생각한다. 창문 밖보다 안이 조금 더 밝은 탓에 그의 얼굴이 유리에 반사된다. 반사상을 루드빅 역시 눈치챈다. 그는 살짝 고개를 뒤로 무른다. 허연 탓에 잘만 반사된다. 노란색 눈동자가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그를 훑어 본다.
ㅤ어라….
ㅤ마치 불만이 있다는 듯 얼굴에 멈춰 서서 노려보는 노란 눈동자가 둘 있다.
#5
ㅤ"루드빅 씨?"
ㅤ"심심해서 전화했지."
ㅤ"매번 심심하세요?"
ㅤ"당연하지. 일이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ㅤ"하긴, 그러시죠. 저번 일은 잘 끝내셨어요?"
ㅤ"물론이지."
ㅤ티아나는 구태여 그들의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결정한다.
ㅤ"지금은 뭐 하세요?"
ㅤ"너야말로?"
ㅤ"저는 집에서 뒹굴고 있는데요."
ㅤ"그런 건 우리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
ㅤ"부모님 집에서도 하고 싶었어요."
ㅤ"그래~. 아, 맞다."
ㅤ"으응?"
ㅤ"이번에 산 계란, 완전 색이 다 달라."
ㅤ"우와, 섞어 키우나 보네요."
ㅤ"그런가. 먹는 것도 자유롭나? 껍데기도, 노른자도 색이 다 달라."
ㅤ"저는 개인적으로 주황색에 가까운 노른자가 마음에 들어요."
ㅤ"…그럼 노란색이 아니잖아?"
ㅤ"그렇지만 더 선명해서 좋잖아요?"
ㅤ"으음, 그럼 '노른'자가 아닌데. 그렇구나. 하긴 더 맛있어 보이지."
ㅤ"루드빅 씨는 색은 신경 안 쓰이세요?"
ㅤ"응, 맛은 거의 같아. 아니, 어쩌면 정말 같을지도. 미각이 변했지만 뭔가 세세하게 느낄 거까진 없는 거 같은데."
ㅤ"공허로도 그래요?"
ㅤ"공허한테 계란을 먹여 본 적은 없는걸. 펫도 아니고. 변신하고 싶은 거나 쓸만한 물건만 먹여봤다고."
ㅤ"창고군요…."
ㅤ"난 먹는 것에 따라 변할 수 있으니까."
ㅤ"달걀이랑 같네요."
ㅤ"웃겨, 내가 노른자란 말이야?"
ㅤ"사실 모든 생물은 달걀과 닮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ㅤ"무슨 의미?"
ㅤ"먹는 것이 바뀌면 영양성분이 바뀌니까 내용물이 약간 다른 모습이고. 껍데기는 낳아준 닭을 따라가고…."
ㅤ"너답다."
ㅤ"루드빅 씨도 달걀같은 거네요."
ㅤ"결론이 빠른 걸. 그치만 달걀은 깨지면 다시 달걀이 안 된다고."
ㅤ"무슨 말이에요?"
ㅤ"그니까, 달걀은 흠이 생기거나 깨지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못 돌아간다고."
ㅤ"루드빅 씨는 돌아갈 수 있단 얘기예요?"
ㅤ"물론이지, 그렇게 험한 일 하는데 내 몸에 생채기 있는 거 본 적 있어?"
ㅤ"…."
ㅤ"없잖아, 그치?"
ㅤ"옷을 복구하시는 거는 이해가 되는데…."
ㅤ"응? 왜."
ㅤ"신체는 어떻게 하시는 거예요?"
ㅤ"그야 공허가,"
ㅤ"먹은 걸로만 변신하실 수 있잖아요."
ㅤ"…."
ㅤ"으응? 예외가 있나요?"
ㅤ"그게, 어라?"
ㅤ"루드빅 씨?"
ㅤ"…."
ㅤ"루드빅 씨, 듣고 계세요?"
ㅤ"…끊을게."
ㅤ"네? 잠깐만요!"
ㅤ"끊을래. 끊을 거야. 손 없어. 그쪽에서 끊어."
ㅤ"손 많으시잖아요."
ㅤ"몰라, 아니야. 없어. 내 손 아닌 걸. 알잖아. 끊어."
ㅤ티아나는 그를 여러번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6
ㅤ오른손은 숟가락을 비스듬히 엎드리게 했다. 흰자와 눈꺼풀 사이에 파고들고는 부드럽게 원을 그리며 파내어 간다. 아직 반을 채 그리기 못했다. 비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의 머리 안에서 계속해서 끊어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육이 끊어지는 소리일 것이다. 차가운 금속이 결막낭을 쓰다듬으며 점차 뜨겁게 체온으로 달궈진다. 오른손은 멈추지 않는다. 왼손으로 짓눌러도 멈추지 않는다. 왼손이 오른손을 할퀴고 긁어도 일체 멈추지 않는다. 느긋하게 반원을 그렸다. 왼눈이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다. 부채꼴쯤을 그렸다. 입술이 달싹 거린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 정말 싫어서⋯. 그렇게 말하려는 듯 오른손이 일체 멈춤 없이 원을 그려냈다. 엎드린 숟가락은 곧 퍼올리려는 듯 점점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얼굴을 적시는 것이 맑은지 붉었는지 알 수 없다.
ㅤ그는 바닥에 웅크리고 누워, 오른눈의 공백을 왼 손가락으로 되짚어보고 있다. 손가락이 안으로 향한다. 움푹하고 축축한 혓바닥처럼 손가락을 가득 머금었다가 도로 뱉어낸다. 뜨겁다. 일말 보이는 것 없이 어둠도 없이 쨍한 빛도 없이 뒤통수가 바라보는 것처럼 오른쪽엔 그저 한없이 공백이. 그 공백 너머에서 오른손이 기어 오더니, 왼눈을 더듬는다. 아직 남아있잖아⋯. 그의 표정은 일말 변화가 없다. 남은 왼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오른손은 고민했다.
ㅤ아직 눈알은 눈알 뒤에 네 개는 더 남아있을 것이다. 누가 뭐래? 하하하⋯. 따지듯이 묻고 싶어도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몸을 일으켰다. 보지 않고도 볼 수 있다. 그는 내팽개쳐진 동그란 눈알을 집어 들어, 손 위에서 짓이겼다. 그러곤 입으로 가져갔다. 누군가 해줬던 말 같은 맛이 난다.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정말, 정말 아무 맛도 나지 않는다.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구나. 얼굴에 남은 핏자국에 맑은 통로가 생겨서 그 길로 물방울이 계속 흘러간다. 왼눈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얼굴에서 싱크대로 추락하여, 스스로 배수구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ㅤ전화를 알리는 소리.
ㅤ"여보세요?"
ㅤ"아, 응. 티아나 양?"
ㅤ"잘 지내고 계시죠?!"
ㅤ"왜 그런 톤이야. 그야 잘 지내지. 아 맞아, 언제쯤 와?"
ㅤ"마침 그 얘길 해드리려고 했어요. 연구소에서 숲 근처에서 나온 생물에 대해서———."
ㅤ오른손을 움직여 그는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재꼈다. 차가운 물이 스테인리스를 두들긴다. 싱크대는 한참 물을 흘려보냈다.
ㅤ"라, 서. 니까, 여서요."
ㅤ왼발이 바닥에 놓인 버튼을 누른다. 딱, 소리가 나자 모터가 회전하며 배수구에 걸려있던 것을 갈아내기 시작한다. 부글거리는 소리까지 내며 모든 걸 갈아낸다. 액체는 모두 흘러가서 하나가 될 거고, 건더기가 남아버린다면 통 안에 한데 모여 그저 그런 이물질이 될 것이다. 물은 나선형이 되어 궤적조차 모르도록 전부 씻어낸다. 배수구에서 배곯는 소리가 난다. 물이 아무리 흘러 들어가도 밑을 채울 줄 모르고 전부 흘려보낸다.
ㅤ"응."
ㅤ"으응. 그래."
ㅤ"아냐. 하하."
ㅤ"그래. 편하게 해."
ㅤ전화가 끊긴다.
Gladly
ㅤ"다녀왔어요~."
ㅤ티아나는 본가에서 따뜻한 휴가를 마치고 숲속에 놓인 저택으로 돌아왔다. 어째선지 더 무거워진 캐리어를 질질 끌고 힘겹게 문턱을 넘어, 신발 밑창을 탈탈 털며 들어왔다. 묘하게 불이 어두워 가만 보니, 거실 조명을 절반 넘게 꺼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혼자 계시니까 그랬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는 캐리어를 현관에 두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ㅤ"루드빅 씨, 저 왔어요~."
ㅤ대답이 없다. 인기척이 있는 곳으로 티아나는 향한다. 사각사각사각사각하고 껍질을 다듬는 소리 같았다. 예상한 위치는 주방이었다. 그리고 역시 주방 싱크대 앞에 서있는 그의 뒷모습이 티아나의 눈에 들어왔다.
ㅤ"루드빅 씨?"
ㅤ"…."
ㅤ"루드빅 씨!" 티아나가 당황하여 크게 소리쳤다. 그에 놀란 듯이, 아니, 생각보다 태연하게 루드빅이 뒤돌았다.
ㅤ"응?"
ㅤ"뭐 하고 계셨어요? 들어왔는데 눈치도 못 채시고."
ㅤ"어? 뭐야~ 왔구나? 연락을 하지. 마중 가려 했는데."
ㅤ티아나는 차마 '혹시 하필 오늘 기분이 안 좋으실까 봐 무서워서 못 했어요.'라고 답하지 못하고, 부모님이 차로 바래다주셨으니 괜찮다는 거짓말을 했다. (실제로는 대중교통을 몇 차례나 갈아타며 왔다.) 외투를 벗어 소파 등받이에 얹어두고, 도로 루드빅이 있는 주방 쪽으로 향했다. 풋내가 난다. 껍질이 도려내진 감자가 몇 개 놓여있다.
ㅤ"알리고(Aligot) 하려고. 밥 안 먹었지?"
ㅤ"앗."
ㅤ"⋯먹고 왔구나?"
ㅤ"아."
ㅤ"안 먹을 거야?"
ㅤ"그, 음." 티아나는 거절하기 어려운 나머지, 알겠다고 답했다. 루드빅은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짐을 정리하고 오라며 티아나의 등을 떠민다. 티아나는 주방에서 살살 밀려나더니, 이내 자기 걸음으로 캐리어까지 걸어갔다.
ㅤ짐을 정리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부분 옷이었으며, 세탁은 이미 마친 것들이 가득했다. 나머지는 집에 두고 온 책이나 사무용품. 짐 정리를 끝내고 손을 깨끗하게 씻은 티아나는 식탁에 앉았다. 여러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 신선한 채소로 만든 샐러드와 알리고를 곁들여 내온 구운 고기. 세로로 반 자른 삶은 계란….
ㅤ"어라, 루드빅 씨."
ㅤ"응?"
ㅤ
ㅤ"이 달걀, 평소보다 노른자 색이 진하네요."
ㅤ티아나는 불현듯 루드빅의 눈동자와 노른자의 색이 같다고 느낀다.
ㅤ"바꿨어."
ㅤ때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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