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투고하였던 '시선'을 약간 보강해서 백업합니다.
원본 : https://sfe2library.creatorlink.net/forum/view/1284784

1

 꽤 오랜 시간을 만난 사람이 있다. 그는 키가 크고 '희뿌옇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이름은 ‘루드빅’이었다. '루드빅 오발리스'. 나는 늘 '루드빅 씨'라고 불렀다. 나는 한때 그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해결사’라고 불리는 용역으로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해결사는 그 단어 그대로 '곤란한 일을 해결해 주는 직업'이다. 해결사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확연히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거나, 수학을 유별나게 잘하거나, 기계 설비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에게 맞는 일을 대신 도맡아 주는 것처럼 해결사들도 자기 능력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보수를 받아 간다.
 물론 앞서 말한 재능을 내세운 직업들은 각자 자기에게 맡는 이름이 있다. 번역가, 물리학자, 엔지니어…. 그런 이름으로 제 위치에 있다. 해결사는 그보다 복잡한 직업이다. 탐정, 심부름꾼, 파출부. 이런 단어가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그것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그런데도 '해결사'라는 단어를 내세우는 것은, 이 지역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초능력'이 너무나 당연해진 이곳에서, ‘초능력’을 스펙으로 내세워 일하는 사람을 두루뭉술하게 말하기 위해서 붙은 게 ‘해결사’다. 물론 직업의 일종일 뿐,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무조건 해결사로 일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물을 X-ray처럼 꿰뚫어 볼 수 있는 (흔히 ‘투시’라고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난 해결사가 아니다. 해결사로 일하기엔, '투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가 매우 한정적이다. 해결사로 살아가려면 조금 더 '각별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해결사가 만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영웅 같은 것이라는 말은 아니라…, 구체적으로 비유하자면, ‘병원에 MRI 기계를 옮기기 위해서 하루 고용된 지게차 운전사’에 가깝다고 표현해야겠다. 전문적인 인력이 없으면 처리하기 어려울 일이 생겼을 때, 그 일에 딱 맞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때 고용하는 게 ‘해결사’였다. 나도 연구에 필요한 표본을 구하기 위해, 해결사를 고용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다만, 루드빅 씨와의 첫 만남은 그런 해결사와 고용인 같은 딱딱한 관계가 아닌, 그저 어쩌다 마주친 사람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내 일을 내가 해결하려 했다. …특이한 생물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숲속을 멋대로 돌아다니던 중에 그를 만났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니, 다리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부산스럽게 수풀을 지나다니는 소리가 갑자기 멈춘 것을 눈치챈 그는 천천히 뒤돌아, 길고양이같이 샛노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내가 보면 안 될 것을 봤다는 것처럼…. 
 그러나,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인 게 느껴졌는지, 이내 그는 한결 부드러운 얼굴로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그 큰 키로 살랑살랑 뒷짐을 지고, 수풀을 가르며, 느긋하게 걸어오는 모습에 그만 몸이 움츠러들어 뒷걸음질 칠 뻔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물러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몇 걸음도 안 되어 단숨에 내 앞으로 온 그는 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여, 당장 내 코라도 물어뜯을 기세로 얼굴을 바짝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 안녕하세요….” 

 차가워진 등줄기를 달래기 위해서, 나는 반사적으로 인사했다.

 그러자, 그는 마치 오랜만에 본 사람에게 인사라도 하는 듯한 억양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가 그때 정확히 어떤 말을 하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초면이 확실함에도 경칭 하나 없이 경박한 말투였다. 신난 태도 하며, 높임말이라곤 하나 없는 말투,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을 반가워하는 말투…. 딱히 싫진 않았다. 그저 당황스러워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가 다가올 때 그의 뒤로 얼핏 보였던 게 동물의 사체였기에, 살벌한 기분이 들어서라도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일까? 그의 다른 모든 행동은 (부담스러울 만큼) 호의적이었다. 떨떠름하게 그의 뒤에 있는 사체에 관해 물으니, 그는 자신이 해결사임을 털어놓고, “의뢰 중이었어.”라는 간단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런 숲에 맨몸으로 혼자 돌아다니다니, 배짱이 장난 아닌걸.” 그의 얇은 입술이 길어지며 초승달처럼 씨익 웃었다.

 나는 그의 말에 자초지종을 풀어놓았다. 표본을 구하려 했단 것. 그는 내 사정을 주의 깊게 듣더니, 잠시 기다리라 말하곤 자리를 떴다. 잠시 기다리다가, '이참에 도망갈 걸 그랬나.'라고 떠올릴 때는 이미 시간이 매우 지나있었다.

 "정말로 기다리고 있네?"

 곧 있으니 그가 이런저런 생물을 잡아 와 내 앞에 던지듯 건네었다. 대부분 숨이 붙어있고, 단단히 묶여있었다. 그가 정말로 무언가를 '해낼' 것 같았기에,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나는 초능력이 생긴 시점에 같이 나타나기 시작한 생물들을 연구하는 학자로 일하고 있어서, 그가 베푸는 호의가 아주 달가웠다. 물론 멋대로 잡아 오는 것이 합법은 아니었지만… 반대로, 불법도 아니었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도 눈물 나게 고마웠다. 그러고는 고작 대가로 본인과 식사해달라는 소소한 것 정도만을 요구해서, 나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던 의심조차 사라질 정도로 계속 반복됐다. 자연히, 점점 그와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알고 지내면 지낼수록 그에게는 '가정적'… 그런 단어가 어울리는 부분이 있었다.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서 그의 기분에 맞춰 행동하는 것은 번거로웠지만…. 삼시세끼 밥을 해주고, 도시락도 챙겨주고…. 내가 자취하던 곳에서 나갈 때가 되자 같이 사는 것을 권하고…, 결국 숲 근처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을 때도 여전히 식사를 챙겨주고, 초조해질 정도로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그렇게까지 해주면서도 내게 바란 것은 소박했던 것 같다. 그냥 같이 있어 주고, 대화에 어울려주면 됐다. 이런 행동만 두고 본다면 그는 '이상적인 짝'이다….
 다만, ‘식사’에 집착이 강한 사람이라서, 나의 식사를 전부 자신이 만든 것으로만 채우고 싶어 했다. 그런 게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으니 나는 잘 따랐다. 그는 요리 실력은 당연히 좋았다. 흠이 있다면 손이 너무 커서 매번 배가 터질 것처럼 먹어야 했다. 마른 몸에 비해, 루드빅 씨는 식사량이 너무 많았다. 힘들었다. 그러나 알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맛은 있어도 투박하던 음식'이 날이 갈수록 섬세해지고, 본인보다 내 입맛을 더 신경 쓰기도 했다. 식탁에 앉아 그가 만든 요리를 먹고 있으면, 그는 서 있는 채로 나를 내려다보며,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와 인연이 멀어진 상태다…. 내가 일하는 연구소가 어느 날인가 부지를 옮기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나도 사는 곳을 옮겨야 했다. 더 좋은 건물로 가는 것이다. 나는 그 소식을 루드빅 씨에게 전했는데, 어째선지 그의 반응이 탐탁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분명 나와 다시 떨어져 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여겼다. 그것이 맞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가 새로운 집을 또 구하는 것도 무리였기에, 나는 그에게 '예전에 그랬듯이' 떨어져 지내도 자주 볼 수 있을 거란 얘기를 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나 '역시' 아쉬운 마음을 품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어째 나와 같은 기분이 아닌 것 같았다.

 그와 떨어져 지내도 그는 나를 따라다녔는데, 그 빈도가 자주, 간간이, 가끔, 간혹, 어쩌다 한 번… 이내 한 달에 한 번 보는 것도 어려워졌다. 나는 그게 신경 쓰여 생각날 때면 그에게 연락하긴 했지만, “미안, 일이 바빠서.”라는 간단하고 무정한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언제나 나를 챙겨주었는데…. 내가 그를 조금이라도 더 신경 써주지 못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선 안 된다고들 하지만, 성인(聖人)이 아니고서야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된 게 아닐까. 그는 마치 무대 위에 서 있는 등장인물처럼 흐름이 끝난 후에, 막이 내리면 더는 만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생각에 답답한 기분이 등을 눌러와서, 한숨을 길게 쉬고 있으니, 옆에서 비덴스 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2

 비덴스 씨와 처음 만난 날은 공교롭게도 루드빅 씨와 연이 흐려지기 시작할 때다. 비덴스 씨는 불그스름하면서도 거뭇거뭇한 부분이 있는 갈색 머리가 인상 깊은 남자로, 키가 크고, 순하게 생긴 눈매에 헤이즐 색 눈동자를 가진 수수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표본용으로 연구실에서 키울만한 특이식물의 정보를 얻기 위해 주변에서 자문하다 보니, 자연스레 만났다. 
 비덴스 씨는 조용한 편이라, 그저 내 이야기를 듣길 좋아한다. 입이 무거운 것과 달리, 그는 적막한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그가 차를 우려내어주는 동안, 공기에서부터 바닥으로 먼지 쌓이듯 내려앉은 침묵을 후후 불어 날려 보내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침묵을 날려 보내기 위해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그는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하다가, 곧 여러 대화를 나눌 수도 있게 된다. 그렇지만, 일이나 사생활을 자세하게 말할 상황은 되지 않아서, 그저 그의 가게 한 쪽에 앉아 이러저러한 동식물 얘기를 늘어놓는 게 전부다. 원예에 조예가 깊은 그와 대화하면, 생물학적으로 다가가는 나와는 약간 생각이 달랐다. 그 방향이 매우 흥미롭다. 비덴스 씨는 루드빅 씨와 비교하자면 별로 알고 지내게 된 날이 길지 않다. 그런데도 이런 흥미가 겹치는 부분이나, 그의 성격이 친절한 덕에 부쩍 친해졌다. 

 그의 능력은 그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성격과 어울렸다. 그의 손바닥에서 갖은 식물이 피어나는 모습을 한 번 보면, 누구든 감탄할 것이다. 제비꽃, 산수화, 패랭이꽃, 네모필라, 이름 모를 들꽃이며…. 나는 그 광경이 신기하여서 그에게 식물에 관한 생물학적인 온갖 질문을 던졌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잘 모르겠어요, 제가 그쪽에 빠삭하진 않아서….”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럼 나도 어째선지 부끄러워져서, 흥분했다며 사과했다. 그러면 그는 아무런 다른 말도 하지 않고 “티아나 씨는 아는 게 정말 많네요.”라며 상냥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만든 식물은 파릇파릇하고 단단하게 살아있다. 물을 주면 고개를 부드럽게 들고, 바람에 흔들리면 그에 맞춰 손짓하는 이파리를 가진 어여쁜 화초들. 그가 그런 아름다운 식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원하는 식물을 떠올리고, 그 식물만큼의 열량을 소모해서 손바닥에서 키워내는 것뿐이라, 식사를 거르지만 않는다면 언제든 꽃을 피울 수 있었다. 식물이 클 때까지는 꽤 많은 열량이 필요하겠지만, 풀로 배를 채우는 것이 어려운 만큼 식물 자체의 열량은 적었기에, 그는 그 능력으로 작은 꽃집을 차려 먹고 살기 부족하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다른 일은 안 해보셨나요?” 나는 장미의 가시를 다듬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대화하기 위해 손에 든 원예용 가위를 내려놓았다.

 “다른 일이요?”

 “네, 다른 일….”

 “음… 어떤 거요? 꽃집 말고라면, 여러 아르바이트도 해봤고…. 평범하게 회사에서 사무직으로 다닌 적도 있긴 하네요.”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비덴스 씨는 내 말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뭔가 다른 걸 기대하셨나 봐요.”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아… 사실 능력이 흔치 않은 거라, 해결사를 해보셨을까 해서요.” 나는 내심 루드빅 씨를 생각하며 말했다. 뭔가 실례를 범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말에 비덴스 씨는 자신의 짧은 옆머리를 걸쳐질 리도 없는데도 귀 뒤로 한 번 쓸어 넘기며 허공을 봤다가, 도로 나를 보았다.

 “해결사요? 생각도 안 해봤어요. 하긴, 특이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일이죠.”

 “아하하…. 맞아요.” 나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특이한 사람이라…. 분명 그렇다. 내 웃음에 그는 더 활짝 웃으며, 자기는 꽃을 피워내는 것이 전부라서 그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건 어려울 것이라 덧붙였다. 그건 그렇다.
 해결사도 하나의 단기 아르바이트 정도로, 즉, ‘이런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공고문에 지원해서 건당 임금을 받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루드빅 씨처럼 해결사 일로만 먹고사는 사람도 있다. 보통 그런 사람은 능력이 아주 유별난 경우가 많았다. ‘물건을 띄우는 능력’(염력)은 흔한 편이다. 그런 능력을 다루는 사람은 그 능력을 제3의 손으로 이용하여 일상생활을 유지할 뿐, 그것으로 먹고사는 것은 힘들었다. 하지만, 그 능력이 아주 섬세해서, 현미경으로 관찰해야 겨우 보일 것을 자유자재로 다룬다면 제법 유별나지 않겠는가.
 루드빅 씨 역시 유별난 능력을 갖추고 있었으니, 해결사로만 생활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 그의 능력을 무어라 정의하기엔 어려웠다. ‘욕심이 많다’고 느낄만한 능력이었다. 어쩌면 ‘변신’하는 것만이 그의 능력이었을 수도 있는데, 그 방법이 복잡했다.

 그는 그림자처럼 검고, 유연한 촉수를 몸에서 꺼낼 수 있었다. 샘이 땅에서 솟아나듯, 아니면, 빗소리에 지렁이가 땅 위로 기어 나오듯 피부 위로 죽 뽑혀 나오는 촉수들. 손처럼 쓸 수도 있었지만, 그대로 짐승이나 사물을 가리지 않고, 부드럽게 감싸 그 흔적도 없이 먹어 치울 수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가 무언가를 먹거나 마시면 그 음식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어, 우리의 모습을 바꾸는 것처럼, 그는 그의 촉수가 ‘먹어 본 것’으로 신체 일부든 전체든, 변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유지하고 조금씩 변해가지만, 그가 욕심이 많은 것인지, 질투가 많은 것인지, 그런 사실은 알 수 없어도…. 먹은 것들의 모습 그대로 변할 수 있었다. 얼마든지 '변신'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변신’한 존재의 능력을 쓸 수 있었다. 말이 능력이지, 초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마치 원래 그런 동물로 태어났던 것처럼 자유롭게 오감을 사용했다. 특별한 시각이 필요하면 갯가재의 눈을 빌렸고, 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기 위해 개, 고양이 같은 흔한 동물부터 올빼미의 귀까지 아끼지 않고 수단을 동원했다. (개나 고양이를 촉수로 먹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어지간히 흔한 생물이라면 모조리 튀어나왔기에 넘어갔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그 변한 몸에 적응해서 마음대로 쓰는 거냐 물었는데, 그는 그저 ‘따라 한다’라는 말 정도를 남겼다.

 “따라 한다니요?”

 “음…. 설명하기 어렵네. 그렇지만 사람은 다 따라 하면서 커왔잖아?”

 “교육… 을 말씀하고 싶으신 거죠?”

 “그래, 뭐, 그런 거 말이야. 고양이가 ‘고로롱’거리는 게 본능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어미한테서 배운다고도 하잖아. 어느 쪽이 먼저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하…. 그러니까 말이야, 뭔가로 변했을 때 머릿속에 떠올라. ‘따라 해야 할 것’이 말이야. 나는 그게 ‘필요’하면 따라 하는 거야. 냄새로 길을 찾는 것도, 초음파로 어두운 동굴을 파악하는 것도. 사람도 배운 모든 것을 항상 시도하는 건 아니잖아? 필요하면 하는 거지. 누에가 뽕잎을 선호하는 게 누에나방에게서 배운 게 아니잖아. 그냥 본능적으로 솔잎이랑 뽕잎이 같이 놓여 있으면 뽕잎을 먹지.
 난 ‘신체’를 따라 할 수 있어. 신체에는 뇌나 신경계도 포함되어 있고. 그렇다면 본능에 의한 ‘따라 해야 할 것’들은 당연하게 따라오는 부속품이야. 물론 그 본능은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갑자기 무척 생리학적인 느낌이네요.”

 “네가 좋아하는 거잖아? 뭐, 아쉽게도 초능력은 따라 할 수 없는 모양이야.”

 “…그, 그건 어떻게 아시는 거죠?”

 “…특이생물 중에도 초능력을 쓰는 녀석은 있어.”

 물론 그런 능력에 나는 가끔 꺼림칙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세간에 아직 제대로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닌 초능력이, 우리가 갈구하던 것과 연결되어 드러난다는 가설. 염력이 유독 흔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야 우리가 평소에 바라는 것이 염력과 가까워서 그럴 것이다. 누워서 전등을 끄고 싶거나, 멀리 있는 리모컨을 가져오고 싶거나, 어깨 아프지 않게 짐을 들고 싶거나, 그런 소소한 욕망. 이 외에도 입이 아프도록 밤새 설명해야 하는 모든 기워 맞춘 듯한 욕구와 초능력 사이의 연관성. 초능력은 신체와 관계없이 오직 정신력만으로도 존재할 수 있는 ‘현상’에 가까운 개념이었기에, 이런 가설이 나와도 다들 그러려니 넘어갈 수밖에 없다. 욕망이 능력을 끌어낸다. 개개인이 바란 것이 현상을 끌어낸다. 아주 그럴싸하다.

 어떤 '성격 검사'가 유행해서 회사 면접 자리까지 그 위치를 하나 차지하고 있던 시대처럼, 다들 이 가설에 혹해서 타인을 몰래 평가하곤 했다. 지금은 생존 본능 외에 그렇다 할 욕구가 있을 리 없는 신생아에게서도 초능력이 관찰되니, 다들 우스갯소리로 삼지만, 여전히 소유자와 초능력 사이를 이어주는 가설 중에서는 가장 유행하고, 힘 있는 가설이다.
 그런 가설에 기반해서 루드빅 씨의 능력을 생각하면 어딘가 이상하다. 촉수가 나오거나 그런 것은 대충 넘겨버릴 수 있다. 분명 누군가는 염력이 물질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어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촉수를 가지고 있다면 그러려니 싶다. 하지만 그 촉수가 형태를 자유롭게 바꿔, 무엇도 아니고 오직 '자신이 먹은 물체'로만 변한다니. 어딘가 기분이 이상해질 뿐이다. 자신을 남의 모습으로 바꾼다는 것은 어떤 욕망일까? 누군가는 질투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수치심이라고도 하지만, 단백질로 이루어진 기계…, '동물'에 불과한 우리에게 그런 감정은 뇌 속에서 차이점 하나 없는 동일체일 수도 있다.
 조금 전에 말한 가설에 설득력을 줄 정도로, 그는 미묘하게 본인의 모습에 자신감이 없단 듯이 구는 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아침 일찍 눈을 떠 방을 나서면 항상 잘 정돈된 모습으로 부엌에 서 있었고, 단둘이 외출할 때 차림이 조금 편해진 나와 달리, 여전히 가볍게라도 차려입은 모습이라는 점. 해결사가 하는 일 중에서도 '사냥'이나 '격퇴' 같은 과격한 단어를 붙여 설명해야 하는 험한 일을 하면서도 항상 구두와 정장, 허리가 날씬하게 내려오는 코트로 치장했다. 그런 모습 뒤에 있을 너저분한 모습을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 것인지, 그는 내게 ‘나갈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심지어… 이건 그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야기인데, 겁 없이도 호기심이 먼저 치밀어 올라온 나머지, 나는 내 눈으로 그를 ‘꿰뚫어 보려’ 했었다.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내부마저도 자유로운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납덩이를 X-ray 앞에 가져다 두고 찍은 것처럼, 뿌연 실루엣이었다.

 그랬던 그의 행동을 생각하고 있다 보니, 얼굴이 구겨지는 탓에 괜히 창밖을 바라봤다. 이렇게 창문 너머를 보고 있으면, 저 많은 사람 중에 그가 섞여 있을 것만 같다. 그라면 할 수 있다. 길고양이든, 들개든, 가로등이나 현관문 같은 무생물부터, 지금 저기 지나가는 '사람'으로 변해서 섞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

 “티아나 씨?”

 비덴스 씨가 뒤에서 작게 나를 불렀다. 뒤돌아보자 걱정이 가득한 얼굴이다. 나는 목소리가 살짝 새어 나와 “아.”하고 알아차린 티를 냈다. 그는 내 얼굴이 어두워 보여, 어딘가 불편한 구석이 있는 것만 같아 신경 쓰여 불렀다며, 만약 아픈 곳이 있다면 비상약이 몇 개 있으니 필요하다면 꺼내오겠다고 말한다. 나는 괜히 웃으며, 햇빛이 눈을 찔러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비덴스 씨는 회답하듯 웃으며, “다행이네요.”라고 말했다.



3

 그날은 비덴스 씨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나를 조심스럽게 그의 가게로 부른 날이었다. 그는 어딘가 창백한 얼굴을 하고, 가게의 불도 켜지 않고 안에 앉아 있었다. 애초에 약속 시간에 맞춰 가게 앞에 도착하니, 유리문에 ‘CLOSED’라 적힌 팻말이 붙어있어서, 그가 가게 안에 없는 줄만 알았다. 나는 문 앞에 서성거리다가, 유리문 너머를 보기 위해 손으로 눈 주변을 가리고 들여다보았다. 가만히 기다리자 그가 카운터 뒤편에서부터 조심스럽게 걸어오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죄송해요.”

 그는 인사보다도 먼저 사과하며 나를 맞이했다. 그는 괜히 오른쪽 옆머리를 귀 뒤쪽으로 밀어 넘기는 행동을 하며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런 그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가게 안의 조명이 꺼져있어서, 생화로 꾸며진 진열대가 조화로 가득한 것만 같다. 벽이며 선반이며 어디든 가득한 화초가 건강한 짙은 초록색 이파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어두운 조명 속에서 그것들이 새까맣게 보여 마음이 불안했다. 
 나는 일단 늘 그와 얘기하던 자리에 앉아 그를 안심시켰다. 비덴스 씨는 자리에 차마 앉지도 못하고 유리문 밖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숨을 그 옆에 놓인 화분의 이파리가 흔들거릴 정도로 한 번 푹 내쉬고서야, 나와 마주 앉았다. 그러곤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나를 보더니, 그는 도저히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몰라서,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을… '나'를 불렀다고 말했다. 무엇보다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그저, 자신이 안전한 것 같은지 가끔 확인해달라고 했다. 나는 그가 하는 말 자체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나, 영문을 알 수 없어 이해되지 않으니 자세히 말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하는 것은, ‘누군가가 따라다니는 것 같다’라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스토킹이나, 괜한 사람을 오해한 해결사 중 하나가 그를 뒷조사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경찰을 부른다면 분명 해결되리라 생각하고, 그가 이야기를 마치면, 일단 그를 진정시키고 그리하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기분이 찜찜한 것을 넘어서 불쾌해질 뿐이었다.

 그는 몇 주 전, 정기 휴일인 월요일에 평소 가보지 않은 동네로 외출을 나갔다고 한다. 어딘가 좋은 화초를 파는 가게나, 기분 전환에 좋은 경험이 생길까 싶어서 말이다. 동네 이름은 분명 나와 루드빅 씨가 살던 곳 근처였다. 이곳에서 아주 먼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까운 곳도 아니니, 분명 ‘외출’로는 좋은 위치다. 무엇보다 그 동네와 이어진 큰 숲은 산책길이 잘 되어 있어서, 식물을 좋아하는 비덴스 씨라면 마음에 들어 할 곳이다.
 그런 예상에 걸맞게 그는 중간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그 산책로 근처에서 내려, 숲길을 따라 동네까지 걸어가려 했다.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하셨죠?”

 “아, 예… 맞아요.”

 “가는 중에 마주친 사람은 있나요…?”

 “으음… 아, 그나마 마주친 거라면 한 분 기억 나는데… 별로 상관없을 거 같아요….”

그는 산책로를 따라가던 중에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 야생동물을 마주친 것은 아닌지 무심결에 돌아보았다. 그러자 검은 코트를 입은 키가 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고 한다. 비덴스 씨는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너무 놀라서 몸이 굳었다고 한다. 나는 그 부분에서 누군가가 생각나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비덴스 씨는 그런 내 표정을 모르고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 남자는 잠시 놀란 얼굴을 하더니, “아,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히 사과하고는 덤불을 헤치고 나와 산책로로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잠시 자기 앞에서 옷을 툭툭 털며 정리하더니, 그대로 자신을 앞질러 산책로를 걸어갔다. 비덴스 씨는 그 모습에 떨떠름하게 서 있다가, 그 사람과 거리를 조금 두고 뒤에서 멀찍이 걸어갔다고 했다.

 비덴스 씨는 그렇게 20분 정도를 걸어가다가, 앞서가던 남자가 방향을 틀어 정돈되지 않은 숲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멀리서 그 뒷모습을 보다가, 그 길 앞에서 발이 멈춰서 그 남자가 향하는 곳을 먼저 바라보았다. 저택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작고, 흔히 있는 개인주택이라고 하기엔 너무 큰 집 한 채가 놓여있는 것이 보였다고 한다. 나는 입을 꾹 닫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루드빅 씨의 집이다. 그 집은 산책로 중간에 난 길을 통해 걸어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항상 그 길이 깨끗하게 정리되어있던 게 기억나서, 비덴스 씨가 말한 ‘정돈되지 않은 숲길’이 신경 쓰였다. 정리하길 그만두신 걸까? …손님이 없어서?
 그는 도전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불러 세우는 일도 없었다. 그대로 길을 지나 동네에 도착하여 이런저런 것들을 구경하다가, 괜찮은 카페가 있어서 가볍게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나무로 된 고급스러운 테이블과 창가에 있는 자리가 아늑하고, 천장이 높은 카페라. 그 동네에 있는 카페는 아직도 잘 있나 보다. 그 카페는 루드빅 씨도 좋아했지….
 루드빅 씨는 카페에 가면 내가 있든 없든 늘 풍경을 바라보고 계셨다. 사람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무언가를 '해소'하시는 것 같았다. 분홍색 옷을 입은 사람을 보다가,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멀어지면 이제 회색 바지를 입은 사람을 보고, 다음으로, 그리고 그다음 사람, 그리고 다시 그다음 사람…. 바깥에 사람이 적어서 볼 게 없다면,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조금씩…. 말씀은 없었지만, 눈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분명 그러고 계셨다. 늘 누군가를 보고 계셨다. 나를 볼 때와는 다른 눈빛이다. 내가 동물을 볼 때도 저런 느낌으로 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덴스 씨는 카페에 앉아 풍경을 구경하거나, 핸드폰으로 SNS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 오후 2시를 조금 넘긴 때, 

 “어라? 혹시 그날, 저한테 문자 보내신 날인가요?”

 “마, 맞아요. 예전에 그 동네에서 살았다고 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나에게 가볼 만한 식당을 아냐는 문자를 보내고, 대화를 조금 주고받은 후, 그는 무언가 뒤를 돌아봐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면서.
 그렇지만,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인간은 흰자가 도드라지게 발달한 동물인 만큼 시선에 민감한 생물이니, 분명 그렇게 ‘느껴질 정도의 시선’이라면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테다…. 내가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눈'처럼 보이는 것조차 없이, 그저 누군가가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기분만 든 상태로 비덴스 씨는 자리에서 일어났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에서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카페에서도 한참 멀어지고, 산책로를 지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중에도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참을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그는 자신이 미친 것은 아닌지, 혹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장난을 친 것은 아닌지 (혹시 모르지, 그런 느낌을 주는 초능력을 가진 자가 있을지) 다양한 의심을 하며, ‘가장 아니길 바라는 것’을 나중으로 두고 여러 검사나 수소문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제일 마지막으로 미뤄둔 ‘진짜로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라는 사실만이 남아버려서 불안하다며 하소연했다.

 “오늘은 어떤가요?”

 “지, 지금은 괜찮아요. 티아나 씨는 안 느껴지시나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다, 다행이에요. 가끔 온 손님 중에서도 몇 분이 시선이 느껴진다고 했었는데….”

 나는 그를 진정시킨 후에, 괜찮을 거라며 달랬다. 혹시나 더는 못 견디겠으면, 해결사를 불러보자며. 그러자 그는 이딴 이야기를 하려고 나를 귀찮게 했다면서, 미안하다고 한다. 그는 사과의 의미로 작은 화분과 과자와 차 세트를 내게 건넸다. 화분에는 둥근 다육식물이 심겨 있다. 그는 끝까지 내게 고개를 숙이며 나가는 길을 배웅했다. 그의 배웅을 뒤로 하고 길을 가면서, 화분은 창가에 두면 좋겠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집에 가는 길에서도 비덴스 씨의 이야기가 계속 신경 쓰여서, 아주 오랜만에 루드빅 씨에게 연락하고자 핸드폰의 연락처를 들여다보았다. 연락 기록에서 찾기엔 너무 오래되어, ‘L’까지 길게 스크롤 하여 그의 번호를 찾았다.
 첫 번째로 건 연락에서는, 음성사서함으로 넘어가는 ‘삐’ 소리가 날 때까지도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

 나는 가슴께가 뻐근할 정도로 답답해졌지만, 입은 벌리지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신호가 간다는 것은 그나마 좋은 징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싫다면 멋대로 끊겠지. 그러니 다시 한번 더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한 번,
 그리고 두 번,
 세 번째… 중간에 끊겼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곧장 “여보세요?”라는 말을 외치듯이 말하려 했으나… 전화를 받거나 거절한 게 아니라, 그저 잠깐 신호가 안 가서 끊긴 것이었다. 민망한 기분 속에서 신호는 다시 이어졌다. 또 신호가 끊겼으나, 이번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피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 

 내가 먼저 전화를 걸면, 그는 첫 번째 인사에서 대답하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매번 침묵한다. 그럼 나는 잠시 그 적막에서 들리는 사소한 잡음을 듣고 있다가, 다시 인사한다.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분명히 루드빅 씨의 목소리다. 나는 무심결에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막 자고 일어난 듯한 목소리였다.

 “주, 주무시고 계셨어요?”

 “으응. 근데 별일이네, 네가 먼저 전화를 걸고.”

 그의 목소리에 묘한 즐거움이 스며들어 있다.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천이나 솜 따위가 움직이는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그런 소리를 듣고서야 목구멍에 남아있던 뻐근한 느낌이 사라졌다.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흠….” 스피커 너머에 있는 루드빅 씨는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앗,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잘 지내고 계신가 싶어서요!”

 “흐응, 못 지낼 건 없지.” 익숙한 대답이다.

 “매번 그렇게 말씀하시네요.” 실제로 ‘잘 지내지’ 못해도 저리 대답하니 어쩔 수 없다.

 “너야말로 잘 지냈어?”

 “네? 네.”

 “나 없이도?”

 그 말에 무어라 대답하면 좋을지 망설여져, 가만히 굳어있었다. 어색한 숨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스피커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그가 노려보고 있는 듯이 뒤통수가 따갑다. 

 “사실은,”

 웃음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파고들어 와 내 입을 막았다. 웃음을 멈추고 침묵하고 있자, 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곤란한 일이 있어.”

 “앗, 어, 어떤 일이요?”

 “이젠 집에 네가 없어~. 재미없어. 이건 중대 사항이야.”

 나는 그의 말에 황당해진 기분을 숨기려고, 그냥 다시 웃는 것을 선택했다. 조금 더 크게 웃었다. 별로 재미없는 것처럼. 스피커 너머는 정적이었다. 살짝 웃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내 웃음소리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내가 웃음을 멈추자, 그는 마치 어려운 글을 읽기 위해 입으로 읊조리며 더듬을 때처럼 어색하게 말을 이어갔다.

 “요즘 점점 마음에 안 들어….”

 목소리가 느릿하게 스피커를 통해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부글부글. 그런 단어가 머릿속에 지나갈 만큼 기어 나오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랬던 적이 있었나? 기분 때문에 여러모로 태도가 변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이렇게 적나라한 말을 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찝찝한 감각 때문에 내 오른쪽 귀에 기댄 핸드폰을 쏘아보듯 눈을 돌렸다.

 “뭐가요?” 다짜고짜 마음에 안 든다고 하니 영문을 알 수가 없다. 따지듯이 묻고 싶었다. 그래도 내 얘기가 아닐 수도 있으니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어서 스피커 너머에서 기어 나온 것은 더욱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어떻게든 고쳐가면서라도 살아가고 싶었지만, 더는 무리인 거 같아….”

 “무, 무슨 소리인가요. 혹시, 그….”

 “얼굴.” 

 차마 멍든 곳을 건드리는 것처럼 되어버릴까 싶어 피했던 말을 루드빅 씨가 대신 가로챘다.

 “마, 맞, 음, 그래요. 얼굴이요…. 만약 그런 고민이라면, 저… 저는, 루드빅 씨가 어떻든 루드빅 씨면 괜찮다고 생각하니까요….”

 거짓 없이 나는 말했다. 사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아예 생각도 못 해본 부분이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은 그 사람을 아껴줄 수 있는가.’ 그렇게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애초에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히 “할 수 있다.”라고 대답하겠지. 그렇지만 이런 나를 그는 알고 있을 테니, 그는 이런 내 말 따위,

 “너는 애초에 사람 모습 따위는 안중에도 없잖아?”라는 말로 어딘가 슬프게 반문할 뿐이었다.

 오늘은 그의 기분이 걱정될 수준이다. 그냥 이런 고민에 ‘루드빅 씨는 잘생겼어요!'라는 말 한마디로 기분이 풀리는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말을 해도 허울 좋은 말을 들은 사람처럼 석연찮게 웃어 넘겨버리거나, '잘생긴 거 외엔 관심 없는 거냐'라는 극단적인 말을 꺼낼 수도 있으니, 전혀 할 수 없다. 이런 대화로는 비덴스 씨의 일을 물어볼 수가 없다. 아니, 생각해보니, 물어봤자 그건 누구냐면서 '관심 없다'라는 말씀을 할 것이다. 가까운 해결사라곤 루드빅 씨뿐인데…. 그렇게 나는 얼굴을 아래로 하고 그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침묵한 상태로 있었다. 곤란하다.

 “어쨌든, 넌 ‘내’가… ‘나’면 된다는 거지?”

 어쩐 일로 이해해주셨다.

 “맞아요!”

 “근데 그런 간단한 고민이 아냐. 훨~씬 큰 고민이야. 나는 말이야, 이왕이면 '누군가'가 좋아하는 내가 되고 싶어.”

 그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는 소리를 했다. ‘누군가’? 혹시 고백인가? 두근거려야 하나? 루드빅 씨가 하는 것처럼, ‘반했다'라는 농담이라도 건네어야 하나? 어떻게 행동해야 그가 만족하지? 그런 고민을 하는 동안 침묵해 버렸다. 그러고는 그는 내가 습관처럼 흘리는 어색한 웃음을 따라 하는 것처럼, 어설프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이라도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아니면 내일?”

 “으음, 그게…. 저….”

 “뭐야~ 안 된다면 안 된다고 해.”

 그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웃으며 말하더니,

 “그런데, 너… 안부 인사를 하고 싶단 이유로 전화한 게 아니지?”

 낮고 스산한 말 한마디가 지나가자마자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그의 말에 인기척을 느껴 곁눈질로 주변을 보았다…. 고개를 돌릴 만큼의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당연히 아무도 지나다니고 있지 않았다. 아무도 없었다. 적막한 거리다. 노을이 하늘을 붉게 적시고, 그 빛에 모든 게 홍차 같은 색으로 물들었다. 아름다움은 뒷전이고 허탈함이 먼저 들어왔다. 거리에는 그저 오래전부터 세워져 있는 건물 벽과 늘 있는 가로등 몇 본, 늘 있는 볼라드와 울타리가 놓여있을 뿐이다. 화초도, 가로수도 그대로였고, 지저귀는 새나, 길고양이 역시 없었다. 시야 속 사물은 당연하게 조용했다.



4

 “오늘은 좀 어떠세요?” 나는 비덴스 씨의 꽃집에 며칠을 연달아 방문하며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최근에는 그 느낌이 사라졌어요…. 누가 쳐다보는 느낌이 사라지니까 이제 좀 살 거 같네요.” 그는 짧은 옆머리를 귀 뒤로 살짝 넘기며 말했다.

 “다행이에요.” 나는 비덴스 씨에게 웃으며 답했다.

 비덴스 씨는 전보다 훨씬 활기를 되찾은 모습이다. 나는 안심했다. 명치 근처에서 해소를 느꼈다.
 언제부터 이렇게까지 이 사람을 자주 찾아오게 됐지…. 그래, 분명 ‘시선’에 대한 문제를 처리해 주고 싶어서…. 이제 그도 괜찮으니 더 찾아올 필요는 없겠지, 그렇지만 조금 신경 쓰여….
 그런 생각에 다시 찾아온 불안이 머리를 휘감아, 목덜미가 뻣뻣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번 전화에서 루드빅 씨에게 정곡을 찔린 탓에,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문자를 주고받았다. 절대 그런 이유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어 하는 나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은 맞지만, 그래도 나도 나 나름대로 신뢰하는 사람을 찾아가려 했을 뿐이니까…. 아니, 이것도 한심하다. 그렇지만, 내 기억 속에서 루드빅 씨는 그렇게 모진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더욱 그렇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분명 그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이겠지. 그렇지만, 역시 그 마지막 말은 기분이 좋지 않다….

 그렇게 조금 고민에 빠져있으니, 내 안색이 어두워 보였는지, 비덴스 씨가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까지 다가왔다. 특이생물과 비교군으로 둘 식물을 고르고 있던 중에다가, 루드빅 씨와의 대화를 다시 살펴보느라, 어느샌가 테이블 위는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정돈이 안 된 테이블 때문에 마주 앉기 난감했는지, 비덴스 씨는 테이블 끝자락에 손가락만 살짝 걸쳐 상체를 지탱하고, 쪼그려 앉아서 나를 올려보았다.

 “표정이 안 좋으세요….”

 “아아,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죠…. 저는 괜찮으니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테이블 정리는 도와드릴게요.”

 “그래도 괜찮다면…. 네, 고마워요.”

 나는 비덴스 씨와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고, 내 짐을 챙겨 가게를 나섰다. 그가 뒤에서 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고, 나는 집으로 가는 길을 느린 걸음으로 조금씩 따라 걸어갔다. 해는 아직 지지 않았지만, 늘어선 건물의 그림자가 기울어져 머리 위가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다. 처마 아래에 모인 비둘기는 몸을 동그랗게 하고 쉬고 있다.
 그렇게 길을 걸어가다 불현듯, 내 앞에 누군가 서 있다는 생각에 그곳을 향해 초점을 맞췄다. 그림자 같은 사람이 하나 서 있다. 긴 코트와 희뿌연 얼굴…. 분명 루드빅 씨다. 나는 반가운 것인지, 질타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는 마음으로 그의 앞으로 가볍게 뛰어갔다. 그는 내가 뛰어오는 동안 단 한 발짝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루, 루드빅 씨!”

 나는 불안한 마음에 그의 앞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름을 먼저 불렀다. 그는 그런 내가 앞으로 올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도착한 나를 약간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미소 지었다.

 “안녕, 티아나 양.”

 그는 여전한 모습으로, 여전한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나는 그에게 미소 지으며 무슨 일로 왔냐며, 달갑게 말했다.

 “딱히. 별일 없어. 그냥 왔어.”

 “저, 저 보려고요?”

 “어머? 그렇다고 해줄까?”

 나는 그 말에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그 웃음에 따라 웃지 않고 그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괜히 그의 침묵을 대답으로 생각하고, 지금 집에 들어가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 말에 흥, 하고 새침한 소리를 한 번 흘리고는 ‘배웅해 주겠다’며 내 옆으로 나란히 섰다. 그 말에 나는 다시 다리를 움직여 길을 걸어갔다.

 “조금 전에 꽃집에서 나오던데.”

 그가 나지막이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 때문에 식물 관련으로 정보를 얻다 보니 친해진 사람이 하는 꽃집이라고까지 말했다. 생각보다 많은 자료를 구했어요. 상냥한 사람이에요, 갈색 머리를 하고 있어요. 아차. 이런 얘기는 하지 말아야 했나. 하지만 그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어딘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한 노란 눈동자가 두 개 놓여있는 얼굴.

 “….”

 내가 그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와중에도, 그는 듣고 있다는 티를 낼 뿐이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끄덕이는 것과, 짧은 감탄사. 초조해진다. 나는 그가 묻지도 않은 연구실 얘기부터 시작해서, 이 근처에 맛있는 미트파이를 파는 가게까지 다 말했다. 마치 너무 오랜만에 만난 사람에게 근황을 모조리 털어놓는 것처럼. 오랜만까진 아닌데도. 언제든 이런 얘기는 할 수 있었는데. 언제든지 전화든 문자든 해서 말할 수 있는 것들인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처럼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을 뿐이다. 
 내가 잘못한 거 같아. 어쩌면 맞을 것이다. 그는 나를 위해서 많은 걸 해줬는데, 고작 떨어져 지내는 동안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것도 못 해주다니. 분명 그것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신 걸 거야. 이제부터라도 잘하자! 기분이 나아지면 분명 예전처럼 연락도 자주 하실 거고, 식사도 초대해 주시고, 도움도 주실 거야. 내가 곤란할 때 늘 그는 도와주고 싶어 하셨으니까. 내가 스스로 해낼 때 실망한 눈치를 보이면서까지 도와주고 싶어 하셨으니까. 도와달라고 하면 반기실 거야. 분명 그럴 거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떡하지? ‘사람을 이용할 줄도 안다’고 냉소를 지으시면 어떡하지? 그야 그렇잖아. 그건 당연한 것들이 아니니까.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거야. 그렇지만 나는 비덴스 씨를 도와주고 싶은데….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래서 나는…. 루드빅 씨가….

 우리는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했다. 그는 정찰이라도 하는 듯이 고개를 두리번거리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집을 살펴본 것 같다. 그러고는 인사라도 하고 싶으셨는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차가운 손이 내 손바닥의 살과 살 사이 틈… 손금을 비집고 기어들어 오는 것이,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들어오실 거죠?”

 나는 그가 손을 잡고 멀뚱히 있는 것이 신경 쓰여, 집에 초대하겠단 의미를 담아서 넌지시 물어봤다. 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내 손을 가만히 붙잡고 있었다. 그의 엄지가 내 손등을 살짝 어루만진다.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면 내 손등을 이룬 피부는 마치 탄력 있는 천으로 만든 커튼을 옆으로 제칠 때와 같이 주름이 잡히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의 엄지에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힘이 들어가 있어서, 내 손등에 있는 뼈와 혈관이 서로 엇물리는 듯한 느낌이 부적절하게 전해졌다.

 “왜 그러세요?”

 “아니야….” 

 미묘한 대답으로 말을 마친 그는 계속해서 내 손을 주물렀다. 주물렀다고 해야 할지, 쓸어낸다고 해야 할지. 차가운 손가락이 내 손등 위에서 나선을 그리며 움직인다. 지나간 자리에 남은 축축한 한기가 마치 예상치 못한 빗방울을 맞았을 때와 같다.

 그가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살가죽을 만질 때는 가끔 있었지만, 보통 배나, 어깨, 손바닥같이 ‘살'이 잡히는 곳이었다. 이렇게 ‘가죽'과 ‘뼈'라고 느껴지는 손등을 만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촉각을 만족하려고도 아니고, 말로 전하기 어려운 애틋함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 손길은 어딘가 ‘탐색'하는 듯 느껴져서 오싹함이 스쳤다. 그의 손가락이 날카로운 도구로 돌변할 것만 같은 기분에, 나는 손을 느릿하게 뺐다.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는 딱히 붙잡지 않고 내 손을 보내 주고, 텁,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힘없이 손을 떨궜다.

 “잘 가, 티아나 양.”

 “루, 루드빅 씨도요. 들어가시면 연락하세요.”

 “….”

 “…들어갈게요!”

 나는 내 집에 들어가려 뒤돌려는 순간, 그의 시선이 약간 기울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잠시 열쇠를 고르는 척, 걸음을 멈추고 그 시선을 잠시 머릿속에서 따라가 보았다. 사선으로 왼쪽 위로 올라간다…. 외벽을 지나서… 지붕에서 내려오는 파이프를 지나서… 창가…, 화분이 놓여있는 곳…. 서늘함이 등줄기에 흘러서 뒤를 돌아보니, 그는 길을 떠나고 없다. 먼 곳까지 둘러보았지만, 노을에 길어진 그림자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루드빅 씨에게서 연락이 오는 대신, 비덴스 씨가 늦은 저녁 시간에 짧은 문자를 보냈다. 시선이 다시 느껴진다는 얘기였다. 내일 오후에 들려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평소대로 오후 시간에 가보겠다며 이야기했다. 몇 마디의 메시지를 주고받다가, 마무리했다. 내가 있어봤자 도움이 되는 것은 하등 없겠지만, 비덴스 씨가 불안을 덜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도움이라고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간만에 긴장한 탓인지 피로가 몰아쳐서 순식간에 잠들었다.

 그러고는 기상 시각을 알리는 요란한 소리에 눈을 떴다. 서늘한 아침이었고, 별다른 일 없으리라 생각하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비덴스 씨에게서 온 연락이 하나 더 있었다. 부재중 전화.

 전화?

 가슴께가 조이듯 불안한 나머지,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이부자리에서 주저앉은 상태로 나는 바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세 번 정도 가던 참에 덜그럭하는 소리가 난다. 분명 전화를 받은 소리였다. 

 “여보세요?”

 어째선지 첫 번째 인사에서 대답이 없어 불안하다. 그가 전화를 받아 전화기를 귓가에 대기도 전에 인사해 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다시 한번 더 인사했다. 목소리에 불안이 남아버려서 괜히 말을 더듬었다.

 “여, 여보세요…?”

 “앗. 안녕하세요.”

 놀란 듯한 비덴스 씨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들린다.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새벽에 전화하셨길래….”

 “아…, 죄송해요. 잘못 눌린 게 아닐까 싶네요. 아침에 보니까, 주머니에 넣어둔 채로 잠들었더라고요.”

 그는 말끝에 작게 웃는 소리를 붙이며 말했다. 그 웃음에 안도감이 몸을 감싸서, 움츠러든 어깨에 힘이 풀렸다. 나도 모르고 있었던 두통이 가라앉는다. 마음 같아서는 이완된 정신에 따라 다시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나가야만 했기에 억지로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전화 때문에 새벽에 깨셨나요?”

 “아뇨, 그랬다면 바로 비덴스 씨한테 전화했겠죠.”

 잠깐의 정적. 마치 숨을 참을 때처럼.

 “그렇군요….” 그가 평소보다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숨소리가 유독 섞였을 뿐이라, 어떤 기분인지는 모르겠다.

 “오후에… 들릴까요?”

 “그러면 고맙죠. 그런데… 이제 나갈 준비 하셔야지 않나요? 가는 데에 40분 정도 걸리신댔죠?

 “아, 아…? 네, 그 정도….”

 “그럼 어서 준비하셔야겠네요. 제가 끊을게요. 아침부터 폐를 끼쳤네요.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비덴스 씨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자, 전화가 끊겼다.

 그에게 내 출근 시간을 말한 적이 있던가.


5

 오후 늦게 찾아간 꽃집은 입구에서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꽃집의 계산대 역할을 하는 길쭉한 테이블, 그 뒤에 마련된 작업실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 너머의 조명이 꺼져있다. 그러나 손님을 맞이하는 곳은 밝게 불이 켜져 있다. 내부가 깊어 보인다. 흐린 날 커다란 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운 복도를 보고 있을 때처럼 깊어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 꽃집의 공기는 어딘가 차분하고 공허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안쪽으로 옮기자, 가림막 뒤에서 어둠을 등지고 비덴스 씨가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낯설게 느껴지는 꽃다발이 들려있다. 그는 꽃다발을 제 자식이라도 되는 양 품에 끌어안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아, 어머. 벌써 오셨어요?”

 “네, 약속한 시각이잖아요.”

 “그랬지… 내 정신 좀 봐요. 연습하느라 잊고 있었어요.”

 그는 고개를 약간 숙인 상태로 가라앉은 표정을 얼굴에 그렸다. 어제 그가 보낸 메시지와는 달리 침착한 그의 상태에,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신 걸까? 그는 가만히 꽃다발을 근처에 내려놓더니, 자기 왼팔을 스스로 오른팔로 부여잡으며,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런 행동이 그를 쑥스러워하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지만, 어째선지 기분을 알기 어렵다.

 “역시 제가 부르면 이렇게나 바로 와주시는군요.”

 “…예?”

 의아한 말을 잇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눈을 반쯤 뜨고 올려다보는 것인지 쏘아보는지 모르겠는 시선과 그의 등 뒤에 놓인 어두운 작업실이 마치 풍경화처럼 맞물려, 나는 등을 뻣뻣하게 세웠다. 어째선지 긴장이 습관처럼 찾아왔다. 익숙한 경직이 척추를 타고 흐른다. 그는 평소처럼 오른쪽 옆머리를 귓등에 꽂으려는 듯이 쓸어 넘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는 그는 언제나 그랬단 듯이, 아니 실제로 그래왔기에…,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대로 테이블 근처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는 알맞게 뜨거워진 물로 차를 우리고, 데운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 행동에 어색한 구석은 없었지만, 어째선지 계속 신경 쓰여서 내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저… ‘시선’은 어떤가요?”

 “이제 괜찮아요. 앞으로도 괜찮을 거 같아요.”

 ‘앞으로도’는 무슨 확신으로 하는 말인가? 해결사나 경찰이라도 간밤에 불러서 해결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를 부를 이유는 없을 테다. 의문이 머릿속에서 꼬여서 당최 풀리지 않는다. 밖에서 덩치가 큰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초저녁을 알리는 소리다. 손이 시리다. 나는 찻잔을 감싸 쥐었다. 그 온도가 손바닥을 달군다. 향기는 익숙하다. 분명 저번에 비덴스 씨가 사과의 의미로 챙겨준 선물에 있던 차와 같은 차다. 나는 차를 마시지 않고 가만히 그를 보았다. 나를 잠시 보던 그는, 눈이 마주치자 무언가 할 일이 떠올랐다는 듯이 움직였다.
 관엽식물의 이파리를 닦고, 시들해져 추욱 늘어진 화초에 물을 주고, 꽃다발을 준비한다. 한참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린다. 전화가 울리면 그것을 받아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고, 감사하단 말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다시 화초를 관리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젖은 손을 앞치마에 비벼 가볍게 물기를 없앤다. 또 오른쪽 귀에 머리카락을 넘기는 모습…. 원예용 가위를 들고 장미의 가시를 다듬는다. 잠시 두리번거린다. 허리를 굽혀 서랍을 연다. 서랍 안에는 꽃다발을 감쌀 때 쓰는 종이가 있다. 색을 고른다. 연한 분홍색의 얇은 종이를 집어 든다. 검지와 엄지로 두 장을 세어 꺼낸다. 가림막 뒤로 갔다가, 빈손으로 나온다. 평소와 같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위화감만을 제외하면 완벽하게 같다. 그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불쾌하리만치 ‘매끄러운’ 행동이 내 눈알에 박히는 것만 같다.
 다시 꽃을 바라는 손님의 전화가 울린다. 그는 손을 넓게 펴 수화기를 집어 들고, 고개를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인다. 그는 귓가에 수화기를 얹고, 늘 그렇듯 “안녕하세요.”로 시작하는 인사를 한다. 몸을 반쯤 돌려 창을 등진다. 머리를 더욱 기울여 어깨와 머리로 수화기를 고정한다. 노란색 메모지를 꺼내 들고, 팔을 바짝 몸에 붙여 볼펜으로 요구사항을 적어 내리는 그 모든 모습이…. 곧게 펴진 허리에 바짝 묶은 앞치마의 끈과 그가 서 있는 모든 모습이….

 ‘누군가가 비덴스 씨를 따라 하고 있다….’

 작살처럼 꽂힌 생각에 숨 쉬는 것을 멈추었다. 울대뼈 언저리에서 턱 막힌 숨을 간신히 의식적으로 넘기었다. 놀란 나의 숨결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참았다. 아래턱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이를 악물고 싶지 않다. 턱이 부들부들 떨리다가, 곧 떨림을 멈춘다. 이를 악문다. 혀를 굴려 억지로 입을 떼어낸다. 마른 입술을 찻잔의 내용물로 적시지 못하고, 침으로 무마한다. 그런 나의 경련 같은 행동을 그는 아직 모르고 있다.
 전화가 끊기자, 그는 메모지에 열심히 옮겨 적은 내용을 다시 살펴보고, 새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벽에 붙였다. 벽에는 그것과 비슷한 메모지가 서너 개는 붙어있다. 며칠 전에도 붙어있던 것 사이에 새로운 것이 붙었다. 그가 방금 붙인 메모지만 유독 눈에 꽂힌다. 빳빳한 종이. 종이 위에는, 외국어를 배울 때 ‘이렇게 쓰라’고 옅은 회색으로 알려주는 글자를 따라 쓴 듯이, 남의 글자를 그리 쓴 듯 다른 메모지의 필기와 달리 이질적이었다. …같다. 같지만 다르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꼭 쥐어 진정시키려 했다. 고양이 앞에 멈춰 선 시궁쥐처럼 몸이 멋대로 멈칫거려서, 평소대로 움직이기 어렵다.

 “왜 그러세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는 내 앞에 쭈그려 앉아, 테이블에 손을 조금만 걸친 후 그 손 위에 턱을 올려 나를 올려다보듯 바라보고 있다.

 “아, 아무것도….”

 “표정이 안 좋으세요….”

 이전과 똑같은 목소리.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말로요? 비상약이 있는데….”

 “그, 그만 하세요…!”

 “네?”

 요동치는 심장에서부터 올라온 목소리로 그에게 호통쳐버렸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분이다.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다. ‘버틸 수 없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서, 마치 지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혼미하다. 어지럽진 않다. 그저 혼미하다. 찻잔이 멀어 보이고, 등 뒤가 허전하다. 시야 가장자리에서 손이 테이블 위를 기어 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꼼짝 못 하고, 그 손이 내 손까지 기어 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섬찟하게 차가운 손이 내 손을 감싼다. 미지근하게 체온에 가깝게 식은 찻잔과 비교하자면, 그것은 마치 냇가에 떠내려오다가 발치에 도달한 젖은 나무토막. 그늘에 내버려 두었던 고기 토막. 물렁거리는 익숙한 체온.

 “괜찮으세요?”

 알고 지내던 사람의 목소리로 듣는 남의 말은 어떤 기분이라고 표현해야 모두가 이해할 수 있을까.

 “얼굴이 창백하세요.”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납덩어리처럼 보일 때의 기분을 무엇이라 말해야 전해질까.

 “루드빅 씨….”

 “….”

 이름을 읊조리자, 그는 내 손을 감싸기를 그만두고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걸음은 둥글게 움직여,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등 뒤다. 아마 나를 내려 보고 있을 것이다. 고개를 차마 들 수 없어서 가만히 찻잔을 보니, 조용한 수면에 천장이 반사된다. 건조한 조명 아래 그림자 진 그의 형태가 미끌미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길게 수면에 늘어져 있다. 그가 그늘을 만들어 내 머리 위에 어둠을 드리우고, 나는 그 그림자 안에서 몸을 움츠렸다. 꼼짝없이 가둬진 것만 같다. 나와 그의 두 얕은 숨결이 교차하는 순간마다, 바닥에서 ‘끔찍함’이 발목을 타고 올라오고 있다. 발목에서 무릎 뒤를 이어서 허리를 타고 목까지 기어 올라왔을 때,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찻잔에 퐁당퐁당 빠지자, 그는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울고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고개를 저을 수도, 끄덕일 수도 없어서 그냥 눈물을 흘렸다. 그런 나를 그는 제 몸통이 내 등에 닿을 만큼 크게 감싸 안더니, 어깨를 가만히 도닥였다. 등에서 맥동이 느껴진다…. 하지만 따스함은 전해지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이 포개졌을 때 느껴지는 아늑한 온기는 없다. 그 사람의 흉통이라 느껴지던 것은 이내, 싱싱한 거머리나 지렁이 따위가 가득 들어 있는 비닐봉지 속에 소금을 넣고 흔들었을 때를 연상케 할 감촉으로 움실거렸다. 귓가에서 진흙을 끓이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눈을 질끈 감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다. 하지만 눈을 감는 것은 안 된다. 그가 ‘보란 듯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 팔을 타고 그의 팔이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내려오는 게 보였다. 어깨에서, 팔꿈치를 지나서 손목까지 도달하고, 천천히 손등을 덮는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파고든다. 사람 형태로 뭉친 끈벌레들의 행진 같다. 사람으로 지내고 싶어서 그러한 형태로 뭉친 것처럼 보인다. 그림자는 무슨 색인가요? 검붉지 않다. 푸르지 않다. 향기가 없다. 온도는 차갑다. 그림자의 그림자…. 부자연스러운 빛깔을 지닌 촉수 덩어리가 내 손을 감싸 쥔다.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는데 이러면 의미가 없잖아….”

 그는 누군지 모르겠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저 “죄송해요….”라고 대답하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가 그리 말하면서도, 그것이 ‘그’에게 무언가 ‘자비’ 비슷한 것이라도 얻고 싶어서 말하는 것인지, 표현하기도 어려운 죄책감이 사무쳐서 말하는 것인지 자신도 구분이 힘들다. 그저 용서를 구했다. 빌고 있으니 그가 내게 대답한다.

 “네 잘못은 별로 없어. 정말 없다고 해도 되는 건지, 사실 나도 확신은 못 하겠어. 따지면 전부 내 잘못이지. 그런 정도의 상식은 나도 있어.”

 말을 마쳐도 나의 대답이 없자, 그는 희미하게 이빨 사이로 숨을 집어넣고, 다음 말을 쏟아내듯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거 알아? 너는 내가 ‘루드빅’인 걸 봐 온 사람이잖아? 그래서 나를 여전히 ‘루드빅’으로 봐주고 있잖아? …나는 그게 굉장히 마음에 들어. 정말로 너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루드빅’으로 보고 있구나! 넌 ‘내’가 ‘나’면 좋다고 했었지. 진심이었구나. 너는 매 순간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해준 거야. 기뻐. 정말이야. 이걸 드디어 확인할 수 있게 되다니. 기뻐. 사무칠 정도야. 
하지만…, 잘 모르겠어. 다른 사람의 감각을 알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너는 가끔 내게 ‘박쥐의 시야는 어떻게 느껴지냐’고 물어보곤 했잖아? 근데, 어떻게 느껴지는지 나도 몰라. 분명한 건 사물이나 작은 벌레가 어디 있는지 느낄 수 있단 사실이야. 다른 동물을 물어봐도 나는 그 감각이 어떻다고 답할 수 없을 거야. 그런데도 다들 호기심 때문에 그런 걸 궁금해하지. 너도 그래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본 거잖아. 너는 호기심 많으니까.

‘다른 존재가 된다’는 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색다른 감각이야. 나에게 있어서는 이것 자체가 ‘미식’과 같았어. 사람들은 아무리 멋진 음식을 먹어도 결국엔 ‘맛있다’는 표현으로 끝내지. 결국 그런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감각’만을 느꼈을 뿐인데, 사람들은 계속 ‘맛있는 것’을 찾아. 그런 거야. 내가 다른 것으로 변했을 때의 감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건, 그런 거지. ‘맛있다’라는 건 ‘만족’을 표현하는 것이지, ‘감각’을 표현하는 게 아니잖아. 무슨 소린지 알겠지? 
 음…, 그렇지만 난 너처럼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게 아냐. 그 ‘맛’을 알고 싶은 게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어. 난 그냥 부러워했어. 남들은 뭐길래 그리도 ‘꽉 들어찬 느낌’을 주는지 너무 탐나서, 오장육부 따위로는 흉내 낼 수 없는, 그 모든 게, 어떡하지, 울어버릴 것 같아….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게 고작 질투라는 사실’을 남이 들으면 뭐라고 생각하니? 비웃나? 가여워하나?  뭐 그런 건 어찌 되든 좋아…, 그래…. 만족을 몰라서… 난 계속 탐내서… ‘배고파서’… 결국에는 ‘루드빅’이라는 사람이 된 거야.
 하지만 마음에 드는 걸 먹어서 변해봤자 어차피 곧 ‘내’가 되어버리니까 의미가 없어. 다시 텅 비어. 내가 가진 게 늘어날수록 내가 가지지 못한 게 늘어나. 점점 내가 늘어나니까 결국에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돌아가는 거야…. 하지만 안 먹고는 못 배기겠어. 맛을 알았잖아. 어차피 사람들도 ‘음식’은 먹어버리면 ‘맛’과 ‘살’ 외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새롭고 맛있는 걸 찾아 먹잖아? 정말이지 손해밖에 없는 삶이야.
너는… 난 네가 마음에 들어, 하지만 먹어 없애버리고 싶지 않아. 너는 ‘나’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야. ‘나’는 네 앞에서 ‘내’가 되고 싶었어!
난생처음 느껴보는 거였어. 나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래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어. 일단 생물이긴 하니까 무언가를 먹는 것에서 느끼는 즐거움은 있었지. 그게 내 피와 살이 되는 건 어차피 소용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도…. 하지만, 하지만, 어째선지 너와 지내는 모든 순간에서 ‘내’가 ‘나’로 느껴져서….”

 

 기아에 허덕이는 듯한 숨소리. 고해다.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그런데 말이지… 사실 처음에는 괜찮았어, 우리는 원래 떨어져 지냈잖아? 하하…. 아무래도 괜찮았어, 그냥 네가 조금 떨어져서 지낸다고 해서 넓은 집이 쓸모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웃는 얼굴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 없는 것도 아냐. 그래서 처음엔 내가 널 보려고 자주 갔잖아. 너도 그것에 무척 기뻐했고 말이야. 나도 기뻤어, 즐거웠어. 그런데 네가 점점 멀어지는 거 같은 거야…. 내 얘기 듣고 있지? 듣고 있는 거 맞지? 나, 너한테 이야기하는 거 맞지? 음, 으음. 등장인물들은 역할이 끝나면 어디로 갈까?”

 “네가 멀어지면 내 역할은 필요가 없어, ‘루드빅 오발리스’ 같은 거창한 이름도 필요 없고, 곱슬곱슬한 하얀 머리도, 샛노란 눈도, 마른 몸도 필요 없어. 어디 괜찮은 대학에 들어가서 먹고살기 좋은 전공을 골랐다는 과거도, 그런 대학도 질려버려서 나갔다는 선택도, 험한 일만 골라서 하는 해결사라는 신분도. 지금 이 말투도. 
 네가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가 ‘한때 알고 지내던 사람’ 정도로 그치게 된다면 ‘나’는 더 있을 필요가 없어. 누구든지 그런 사람이 있지? 예를 들자면, 어릴 때 어깨동무하며 날마다 같이 하교하던 친구 같은 거 말이야. 어떤 사람한테는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누구한테는 부모님? 뭐든 그 ‘순간’만큼은 평생 지낼 것만 같잖아?
 하지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서, 환경이 바뀌어서, 별의별 이유로 나타나는 것들이 관계에 파고들면, 더는 그들이 ‘너의 사람’이란 역할을 가질 수 없어. ‘네 시선 안’에서 살지 못하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네 앞에서 ‘내’가 될 수 없어….”

 “그렇지만 나한테는 좋은 방법이 하나 있거든, 그 새로운 등장인물을 하면 되는 거잖아. 자 봐봐, 이 거뭇거뭇한 갈색 머리, 초록색 눈에 순한 인상. 네가 마음에 들어 했지? 정말 다행이야, 이 사람이라면 초능력도 흉내 낼 수 있어.”

 살굿빛의 기묘한 덩어리는 내 손을 여전히 감싸고 있다. 나의 얼굴 근처로 구멍 뚫린 구체… 얼굴이 다가온다.

 “사람은 겉모습 말고는 하등 쓸모가 없어,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게 다 그렇다고, 겉만 갖추면 내용물은 저절로 만들어져. 상자는 뭔가를 담기 위해 존재하지만, 담길 게 있으니까 상자가 있는 거야. 목숨은 물질이 아니지만, 뇌는 물질이니까! 당신이 마음에 들어 한 ‘제’가 될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이 언젠가 말했죠. ‘몸이 있기 때문에 영혼이 만들어진다’고! 
 ‘나’는 그 말에 아주 동의했어. 이거 보세요, 단순히 그 사람의 모습을 하는 것만으로… 이렇게나 그 사람이 될 수 있어요…. 물론 습관이 아닌 것들까지 할 수는 없으니까…. ‘따라 하라’고 떠오르지 않는 것들까지 내가 할 수는 없으니까, 계속 그 사람을 봐야만 해. 계속 집요하게 바라보는 거야. 평균을 구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 너는 연구하는 모든 생물이 어떤 ‘습관’을, 어떤 ‘본능’을 가졌는지 계속 관찰하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껍데기만 있으면 그런 건 전부 따라 할 수 있어. 전부 내 것이 되는 거야. 하지만 역시 내 것이 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어. 내가 의미가 없으니까….”

 “나는 아무 의미가 없어….” 

 그는 마치 추운 밤에 걸친 담요처럼 나를 감싸고, 내 양어깨를 다섯 개씩 두 쌍, 총 열 가닥의 촉수 덩어리로 쥐었다.
 그의 중얼거림이 점차 격양되어 그의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의 아우성처럼 들렸다. 수십… 수백…? 수천도 될지도 모른다…. 그것들의 비명이 하나가 되어 들리는 것 같다. 그 모든 게 ‘그’가 되었기에…. 나는 더 눈물 따위를 흘리는 것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기분이 되었다. 머릿속이 수압으로 짓눌린 느낌이다. 뇌수를 쏟아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중에도 그의 모든 행동과 말투는 ‘모방’으로 보였다. 분명 누군가의 흔적이다…. 분명 누군가의 삶이다…. 분명 누군가의 온도다…. 분명 누군가의 것이다…. 그 모든 게 그를 이루고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살아오는 모든 순간이 그에겐 ‘애드리브’다…. 각본 없는 연극을 계속 연기하기 위한 발버둥이다…. 그는 마치 이것이 마지막 대본집이라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절규 같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티아나, 티아나! 티아나 페인! 당신은 내가 어떤 것이든지 표본처럼 핀을 박아서 하나의 이름을 붙여 줘! 그저 ‘나’인 것 자체에 ‘의미’를 주는 거야. 더는 아무것도 없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야! 나는 당신만 있으면 언제나 여기 있을 수 있어…. 그러니까 그냥 계속 있어 줘, 계속 있어 줘, 외로워, 외로운 건 싫어, 없어지고 싶지 않아, 없어지지 말아줘, 확실해지고 싶어, 확실하게 해줘. 명확한… 명찰을… 명찰이…. 나만 껍데기를 쫓아다니며 살아가야 하는 건 억울해, 싫어, 무엇이든 되어줄게, 무엇이든 옆에 있어 줘…….”

 지독하게 눈길을 주는 곳마다 따라붙는 외로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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